"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잔인한 말.
드라마 스캐이캐슬을 정주행했다. 어떻게 봐도 불쌍한 사람으로 가득한 드라마였다. 2018년 인생 드라마였던 [나의 아저씨]에서 느낀 불쌍함과는 또 다른 불쌍함. [나의 아저씨]가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쉽게 알아봐주지 않는 존재로서 애틋하고 불쌍한 서로를 안아주던 이야기라면, [스카이캐슬]은 '대체 무엇을 위해 우리가 이렇게 불쌍해졌는지'를 말하는 드라마였다고 생각한다.
그 잘난 '피라미드'의 끝엔 뭐가 있을까.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으면 행복하긴 한걸까. 친구를, 이웃을, 가족을 밟고 올라서며 그들은 정말 만족을 느끼고 행복해졌을까.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넘어, 하늘 끝에 맞닿아 있는 것 같은 '스카이 캐슬'엔 왜 그렇게 '무너져내리는' 사람들 밖에 없을까. 견고한 '캐슬'은 왜 무너져 내렸을까.
자유의지가 없는 아이들, 어디로 가야할지 생각해 본적이 없는 불쌍한 존재들
스카이캐슬에 나오는 모든 아이들은, 개개인의 '인격체'가 아닌 '소유'의 대상이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슬픈 점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드라마 속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인생은, 돈, 명예, 지위로 치환되는, 마음만 먹으면 돈이라도 써서 바꿀수 있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철저히 부모의 '소유물'일 뿐, 아이들에겐 선택권이 없다. 자유의지도 없다. 별난 꿈도, 소망도 보이지 않는다. 스스로 고민하면서 선택권을 쥐고 있는 아이는 우주를 제외한 단 하나도 없다. 불행한 자신의 인생을 가장 강렬하게 헤쳐가며 굳건해 보였던 혜나마저, 비극과 눈물로 가득한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한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당연한듯 그렇게 살아왔다는 비극
비단 '아이들' 뿐이던가. 어머니의 뜻대로 살아 '반평생'을 자신에게 뭐가 중요한지 모르고 살았다며 오열하던 준상,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감추고, 한 남자의 완벽한 아내, 시어머니의 순종적 며느리로 살아야 했던 '곽미향' 예서 엄마, 남편이 얼마나 고약한지 알면서도 자신과 아이들을 지키지 못했다며 '통렬히 반성하던' 승혜, 이리저리 모든 상황에 끌려다니는 '찐찐 부부', 모두가 불쌍한 존재다.
이 불행의 원인을 ‘자식을 내것’이라며 소유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자식 인생이 곧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의 것이라고 여기는 부모의 태도에 있다고 말한다면 지나칠까.
’소유 의식’이 젖어든 ‘내 자식’, ‘우리 딸’이라는 무서운 말.
스카이캐슬에서 아이들 성적이 좋을 때 부모에게 듣는 말은 ‘우리 딸’, ‘우리 아들’이다. 반대로 성적이 망가지면 듣는 말은 ‘대체 누굴 닮아서’다. 전교회장이 되어야 ‘어이구 예쁜 우리 딸’이 되고, 내신 2등급을 받으면 ‘저 새끼, 이 자식들’이 된다. 결과가 좋을 때는 자식이 '나의 것’, 결과가 나쁠 때는 ‘남의 것’이 된다. 분리불안을 겪고도 남을 일이다. 1등하지 못했을때, 100점이 아닐 때의 불안감은 대체 누가 안아줄 수 있을까. 성적이 떨어졌을 때 부모가 던지는 말들에 어떤 가시가 있는지 부모들은 알까.
언제나 잘 꾸며진, 아름다운, 흠결이 하나도 없는 자식이어야 ‘내 자식’이고, 나의 인생을 빛나게 해줄 수 있어야 ‘내 자식’이고, 부모를 자랑스럽게 해주어야만 ‘내 자식’이라는 슬프고 무서운 말. 모두가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라지만, 본인의 인생을 자식에게 걸었다고 볼수밖에 없는 불쌍한 부모들의 일반통행식 독백이다. 내 자식, 우리 아들, 우리 딸이란 말은 ‘영역’, '가족이라는 울타리'의 상징으로써만 존재해야 옳다. 도구나 소유물로서의 '자식’이란 개념은 있어서는 안된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이 대사의 핵심은 ‘어떻게’에 있다. 자식을 ‘키우는’ 것은 부모의 역할과 의무가 맞다. 자식을 ‘기르고, 키우는 것’을 부모의 선택이라고 말할 순 없다. ‘기르고 키울 생각이 없었다면’, ‘기르고 키우는 것을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면’, ‘가지고 낳는 선택’도 하지 말았어야 옳다.
자식을 갖는 일은 그래서 숭고하다. 앞으로 펼쳐질 어마어마한 삶의 무게를 짊어질 선택을 하기로 마음먹었다는 뜻이다. 세상에서 무엇보다 소중한 생명을 잉태하겠다는 결심이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보듬고 지켜내겠다는 다짐까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어떻게’ 키우는 것은 선택할 수 있다. ‘어떻게’의 정의는 모두 다르며 각자가 정의하는 ‘잘 키움’의 기준은 부모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키웠냐’의 결과물로서만 자식을 대하는 방식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됐다. 자식이 수학 교과서에 나오는 함수 y=f(x)가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널'이라는 공식을 들이대서 '너라는 결과'를 재단하는 건 폭력적이다.
'내가 어떻게 널'이라는 함수에, 자식의 행복, 자유의지, 관심사와 선택을 변수로 두지 않고, 왜 나의 노력과 애정이 너의 결과로 나오지 않았냐고 다그칠 요량이라면, 그건 순전히 부모의 바람이자 욕심일 뿐이다. 아이의 꿈은 아니지 않나. 아이에겐 아이만의 변수가 있는데.
‘병원장 아니더라도 그냥 엄마 아들 하면 안되요’라는 말에, 요지가 있다. 못나도, 잘나도, 부족해도, 모자라도, 자식은 자식이지 그렇지 않아서 내 자식이 ‘남의 자식’이 되지 않는다. 자식이 어디 내가 원하는 대로 조각되지 않아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뭉개 버려도 되는 지점토, 찰흙 덩어리인가.
'엄만 니 인생 포기못해.'
이 대사의 방점은 ‘포기’를 못한다는 대상이 무엇이냐에 있다. ‘니 인생 포기 못한다’는 말은 ‘네 인생으로 인해 나의 인생까지 망가지는 걸 포기할 수 없다’는 말과 다름 없게 들린다. 그래서 슬프다. 왜 한서진의 인생은 그렇게 정의될 수밖에 없는 걸까. 또 왜 예서의 인생은 부모가 포기할 수 있는, 또는 없는 성격의 목적어로만 존재할까. 왜 예서의 인생은 ‘삼대째 의사 가문’의 명맥을 잇는 걸로만 ‘성공’과 ‘실패’를 얘기할 수 있을까.
바로 예서 인생이 한서진, 그리고 예서엄마의 유일한 ‘존재 이유’기 때문이다. 삼대째 의사 가문을 만들어야하고, 불행했던 과거를 메꿔줄 예서 엄마로서의 지위, 전교 1등 엄마로서의 자부심. 곽미향이 아닌 한서진으로 살고 싶었던 처절한 몸부림을 위로해줄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예서 인생을 포기할 수 있는 주체는 예서 뿐이다. 인생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 ‘주인’의 몫이다. 그래서 ‘예서 인생의 주인’이 아닌, 한서진은, 예서엄마는, 곽미향씨는, 아무리 자기 인생이 지리멸렬했다고 해서 예서 인생 좌지우지할 ‘주어’가 되어서는 안된다. 예서의 인생은 오로지 예서의 것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서가 한 생명으로 태어났고 존재하기 때문에 예서의 ‘인생’도 존재한다. 예서가 죽으면 예서의 ‘삶’은 거기서 끝난다. 그래서 예서의 인생은 ‘한서진의 것’이 될수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 자식 인생을 부모가 죽이고 살리고, 짓밟고 바꾸고, 뭉개뜨릴 순 없다.
'엄마가 다 알아서 할테니까, 우리 딸은 신경쓰지 말고 공부나 해.'
예서는 자신의 인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그 어떤 결정권도 없다. 의대를 가고 싶다는 예서의 바람도, 모두를 이기고 짓밟겠다는 뒤틀린 ‘욕망’일 뿐이지, 고민과 선택이 들어있지 않다. 내 인생이고 내 결정이어야 하는 인생의 주체로서 어떻게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오로지 ‘공부’ 그 하나만 신경쓸 수 있는가.
아직 배우지 못해서, 경험할 것들이 더 많기 때문에 아이들의 인생은 단지 그 이유로 바빠야 한다. 아이의 그릇만큼 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배우고 느끼는데 시간을 써야 한다. 아이가 자신의 그릇과 범주를 넘어선 것에 과도하게 매달리고 신경 쓸때만 ‘네 영역이 여기까지야’라고 조언해줄 수 있는게 부모가 건드릴 일이다.
망가져도, 넘어져도, 실패해도 그건 예서의 선택과 예서의 생각에서 나온 결과여야, 예서는 비로소 굳건히 성장할 수 있다. 드라마속에서 가장 쉽게 무너져내리는 캐릭터가 ‘예서’다. 자주적 고민과 선택없이 모든 것을 다 맡기고 ‘엄마’가 시키는 대로, ‘김주영 선생님’이 이끄는 대로 살았던 예서가, 그리고 그에 앞선 영재가, 그야말로 ‘최악’으로 망가지는 걸 모두가 목격하지 않았는가. 최고로 성공한 것 같지만 최악으로 망가진 불쌍한 존재들.
부모의 자랑거리로 살아야만 했기 때문에 1년이나 하버드에 다녔다고 거짓말을 둘러댄 세리도 있다. 결국 그 모든 마음의 짐을 다 털어버린 세리는 그제서야 누구보다 당당해질 수 있었다. 엄마의 지원과 지지로 차츰 본인들의 목소리를 되찾는 서준이와 기준이처럼, 모든 상황에 주체적 문제의식을 가진 예빈이처럼, ‘진짜’ 제대로 가출을 하고 요리조리 피해가며 ‘망가져도 괜찮다’고 말하는 수한이처럼, 부모의 지지와 믿음으로 굳건히 서는 우주처럼, 예서에게도, 영재에게도, 적어도 부모와의 빈틈, 쉴틈은 있어야 했다.
'어머니, 왜 절 이렇게 만드셨어요? 어머니가 하라는대로 다 했잖아요.'
대체 누구를 탓할 일인가. 모두 준상의 선택이었다. 쉰이 된 나이까지도 부모와 분리되지 '않음'을 그 스스로 선택한 결과다. ‘그러면 안되느냐’고 소리쳐 물은 적도 없다. 대체 왜 그렇게 모든 것이 '수동태’여야만 하는가. 인생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쉰이 다 되서야 '능동형'으로 울분을 토해내는 준상.
그가 그 순간에 쓰는 표현마저 '언제까지 저를 무대에 올려 놓으실 거에요'다.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살아드렸잖아요'다. 어머니가 자신을 마구 휘두르도록 또 그렇게 내버려 둔다. 그래서 준상의 뒤늦은 자기반성은 무척 슬프다. 여전히 수동형이다. 이건 그 누구도 위로해줄 수 없다. 바꿀 수도 없다. 뒤늦은 후회를 해봐야, 50년 세월이 무상할 뿐이다. '저는 이제 어머니의 무대에 서지 않을 겁니다. 제가 원하는 대로, 제 의지대로 살겠습니다.'라고 말했더라면 더 나았을까.
말을 타고 있는데 고삐는 조련사가 쥐고 있는 어린이 동물원에서, 아이가 말을 타는 목적은 '안전이 보장된 울타리 속의 새로운 경험'이다. 아이는 그저 부모가 마련해준 '안전망' 안에서 말을 '타보는 경험'만으로도 좋은 추억을 만드는 것이다. 그게 성인이 되기 전까지 아이와 부모가 해야 할일이다. 안전을 제공하는 부모, 경험을 해나가는 아이, 딱 거기까지다.
이제 어린이가 아니라면, 내 안전은 내가 책임져야 하는 성인이라면, 고삐도 내가 쥐고, 방향도 내가 틀고, 속도도 내가 바꿔야한다. 20년, 30년을 인생이란 말을 타고 살았는데, 여전히 고삐를 쥔 조련사가 붙어 있다면, '그보다 시시한 인생'은 없다.
자신의 인생을 위한 의사 결정 하나 못해서 꼭 누구에게 물어야 하고, 남이 조언해주는대로 하지 않으면 마냥 불안해 하는 어른답지 못한 어른이 넘쳐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고삐를 순순히 넘겨 줄 어른도, 자신감 있게 넘겨 받을 어른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와의 분리는 그토록 중요하다. '효도'라는 이름으로, '아무리 그래도 부모인데'라는 미명으로, 부모가 시키는 대로, 부모의 뜻대로만 살다가 성숙한 어른이 될 기회를 놓치고 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부모와 분리가 되지 않으면 어른이 되어서도 자주적 판단을 할 수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고약하고 지독한 트러블이 숱하게 생긴다. 나중에 남탓할 요량으로 '시키는대로 살아드렸다'고, '내 인생 책임져'라고 말할 거라면, 그건 정말 비겁한 변명이다.
부모의 인생은 부모의 인생이며, 나는 나의 인생을 살아야 옳다.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나'는 각자가 분담한 '역할'을 해내면 그만인 것이지, 그 어느 누구도 서로의 '소유물'처럼 존재해선 안된다. 자신을 지우고 엄마아빠의 아들딸로 살다가 어느 순간 '망연자실'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그동안 숱하게 봐왔다. 하루가 멀다하고 나오는 가족문제들, 명절때마다 보도되는 안타까운 사연들, 부모와의 분리가 되지 않아 지치도록 싸우다 이혼하는 부부들, 대부분 어느 시기에 적절히 거쳐가야 하는 '부모와의 분리'를 제때 거쳐가지 못한 사람들이다.
반드시 나를, 내 인생을 찾아야 한다.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으니 매우 혹독하고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해도 피해갈 수 없다. 더 나아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지워내면 안된다. 나를 지워 버리면, 쉰, 예순이 되도록 내인생 알맹이 하나 없이 빈 껍데기만 남는다. 그때 가선 남탓할 수도 없다. 너무 늦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은 부모의 것이 아니라, 부모와 분리되어 있는 '나의 것'이다. 독립된 인격체로, 홀로 바로 선 인간으로 남아야 한다. 하나의 주체적인 인간, 선택하는 인간, 자유의지를 피력할 줄 아는 인간,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인간으로 남을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산다.
부모가 할 수 있는 것
부모는 자식을 ‘기를’ 수 있다. 그것이 그저 부모의 수많은 역할 중 하나다. 그것은 부모의 ‘역할'이지 '권한'이 아니다. 부모의 꿈은 부모의 꿈이다. 자식에게 내 꿈을 투영할 것도 없다. 부모의 후회는 부모의 후회다. 자신의 욕망과 꿈을 자식에게 투영하면서 자식의 선택과 권리를 박탈할 셈이면, 팔다리를 자유자재로 꺾고 맘대로 옷을 입혔다 벗길 마론 인형을 낳은 것이지, 인간을 낳은 것이 아니다. ‘내 자식'이란 말에는 ‘내 소유의 자식’이란 의미도,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의미도 절대 뒤섞여선 안된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말은 그래서 무섭다. 원치 않는 사람에게 '내 방식'을 강요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 애정을 가장한 지독한 폭력이다. 종편에서 유례없는 시청률로 막을 내린 스카이캐슬을 다 보고도 '예서 책상'이 품절이 되는 대한민국이라는 잔인한 '캐슬'이, 그래서 나는 소름끼치도록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