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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인의 청춘 May 08. 2019

나는 왜 너를 미워하는가

'극혐'에 대하여

나는 바퀴벌레와 쥐를 끔찍하게 싫어한다. 보자마자 소름이 확 끼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바퀴벌레, 쥐는 어떻게 할 수라도 있으니 안심이다. 살충제를 뿌리던, 쥐덫을 놓던, 내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란 것이 나에게 안심을 준다. 언제고 바퀴벌레나 쥐를 다시 보게 되면 또다시 소름이 끼치는 기분이 들 것이 뻔하고 그 기분을 상상하는 것이 '극도로 싫지만', 그나마 바퀴벌레나 쥐는 내가 싫어해도 되고,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방법이 있어서 다행일 뿐이다.


모든 바퀴벌레가 싫다. 바퀴벌레가 싫은데, 그중에 '귀여운 바퀴벌레'를 골라서 좋아하진 않는다. 바퀴벌레 입장에선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살충제 난사에 운명을 다해야 하는지 영문을 모를 일이겠지만, 모든 바퀴벌레는 내 앞에 나타나기만 한다면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떻게 해야만 한다. 안타깝게도 나는 바퀴벌레와 '소통'할 수 없고, 내 앞에 나타나지 않길 바란다며 부탁을 해볼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바퀴벌레가 나타나는 순간,  바퀴벌레를 죽이기 위해 가장 강력한 살충제를 꺼내어 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 그렇게 나는, 바퀴벌레를 '극혐'한다.



혐오가 넘치는 세상이다. 부지불식간에 누군가가 어느 누군가에게 '극혐'의 대상이 되고 만다. 틀딱충, 맘충, 개꼰대, 아재, 김치녀, 한남충, 메갈 등 프레임도 참 다양하다. 너무 싫고, 정말 미워 정도가 아니라,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며, 종국에 '상대의 소멸'을 희망한다.


우리는 어쩌다 서로에게 '벌레'가 되고 말았을까.


미워하고 싫어하는 대상은 남녀노소, 세대를 넘나 든다. 청소년들이 어른을 싫어할 수 있고, 어른들이 아이들을 싫어할 수 있다. 남성이 여성을, 여성이 남성을 싫어할 수도 있다. 가난한 자가 부자를 싫어할 수 있고, 부자가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며 증오할 수도 있다. 카페에서 공부를 하는 '카공족'이 민폐충이 되고, 돌봐줄 사람이 없어 어딘가에 아이를 동반할 수밖에 없는 어머니가 '맘충'이 된다. 유독 피곤했던 날 지하철에 자리가 없어 불편했단 이유로 '틀딱충'들이 득시글해 더욱 피곤한 하루였다고 푸념할 수 있을지언정, 진정 그중에 '미움을 온전히 받아도 마땅한', '벌레'같은 어른은 대체 얼마였을까.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애정 하는 마음, 아끼는 마음이 있듯, 싫어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도 자연스럽다. 누구나 자신만의 '호불호'가 있을 수 있다. 다만 우리는 누구나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그게 결코 완전무결할 수 없는 인간이 갖는 한계다.


카페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는 싫지만, 나는 엄마고 내 아이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예쁘다. 갑질 하는 상사는 싫지만 나도 언젠가 팀 리더가 되고, 부장- 그리고 부하직원들은 내가 어떻게 하든, 분명 나를 싫어할 것이다-이 된다. 한해 한해 나이 들어가고 주름이 생기는 것은 싫지만, 나도 반드시 언젠가 중년에 이어 노년을 맞이한다. 의무를 다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남자는 싫지만, 군대 가는 남동생을 보면 눈물이 난다. 힘들고 어려운 일에서 무조건 도망치려는 여자는 싫지만 내 여자 친구도 때론 나보다 연약한 여성인지라, 한밤중에 택시를 탔다는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철렁한다. 나와 별 관련이 없는 어른이 내 인생에 이래라저래라 잔소리를 하는 건 듣기 싫지만, 내 인생을 이끌어 준 우리 부모님은 내 인생의 등불이었다.




가만히 둘러보면,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르고 싶은 어른도 있다. 심지어 많다. 그런 예가 없는 게 아니다. 반대로 나이에 관계없이 훌륭한 인격체로 성장하는 아이들도 있다. 열심히 살아가면서 부를 차곡차곡 축적한 사람을 '돈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미워할 순 없다. 반대로 가난하다고 해서 이유도 없이 누군가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 모른다. 충분히 애써 소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의 어머니가 연세가 있다는 것 때문에 틀딱충이 되고, 나의 아버지가 직급 때문에 개꼰대가 되고, 내 부인이 아이를 돌본다는 이유로 맘충이 되고, 내 아이가 그저 어려서 뭘 모른다는 이유로 망나니가 되는 세상은 내겐 서글프고 무척 지독하다.


그래서 내 어머니가, 나의 아버지가, 사랑하는 나의 누나가 누군가에게 '극혐'의 대상이 된다는 건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억울하고 화가 난다.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냥 상대가 그렇게 나를, 내 가족을, 내 친구를 미워하고 싫어한다는데 어쩔 일인가. 나의 아버지, 나의 남편, 내 아들, 우리 형이 남성이라는 이유로 '한남충'이 된다. 동시에 나의 어머니, 부인, 나의 누나, 나의 딸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메갈', 김치녀'가 되고 만다.


무척 억울하다.


나의 아버지, 나의 어머니, 나의 누나는 눈을 씻고 찾아본들, 곱씹어 생각한들, 한남충, 틀딱충, 메갈, 김치녀, 맘충이라는 소리를 들을 그 어떤 잘못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어른이 '틀딱충'일 수 없다. 그게 맞다면, 오늘 저녁을 함께 할 당신의 부모님도 영락없이 '틀딱충'이어야 한다. 일부에게만 예외를 적용하는 건 매우 비겁한 일이다. 그게 사람이 가진 '주관', '소신', '줏대'라는 것이다. 세상 모든 남자가 '한남충'일 수 없다. 그렇다면 내 남동생도, 내 아버지도, 나중에 자라 큰일을 해주었으면 하는 내 아들도 '한남충'이어야 한다. 모든 여성이 '김치녀', '메갈녀'이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와 우리 누나는 '메갈녀'여야 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사랑하는 조카는 이제 여덟 살인데 '김치녀'이자 '급식충'이어야 한다. 우리 누나는 안 그래, 내 여자 친구는 안 그래, 우리 부모님은 꼰대가 아니야, 우리 할아버지는 틀딱충이 아니야,라고 항변해봤자, '내로남불'이다.




흔히 젊은 세대가 많이 쓰는 표현 중에, '케바케', '사바사'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케이스 바이 케이스', '사람 바이 사람'이라는 뜻인데, 이처럼 '극혐'의 대상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 사람 바이 사람이어야 맞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으이그 역시 한남충이란', '김치녀 납셨네', '틀딱충 개극혐'이란 댓글이 수두룩하게 달리고, 모두가 또 싸우기 시작한다. 상대가 바퀴벌레 같은 존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프레임에 속하는 그 순간 너나 구분이 없다. 나의 생각, 나의 가치관, 생활태도와 상관없이 누군가의 '극혐'의 대상이 되는 건 순식간이다.


탄식이 흘러나온다.


최근 일어난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남성이라서 한국 남자들은 모두 살인의 DNA를 갖고 있나. 성폭행범이 남자라서 한국 남자 모두는 잠재적 강간범인가. 어쩔 수 없이 퇴사한 여성이 임산부라서 '역시 여자는 절대 채용해선 안 되는' 건가. 국민 연금이 고갈날 처지에 있기 때문에 노인들은 다 '죽어 없어져야 하는가'. 지하철 우대권을 사용한다는 어르신들이 많아서 '틀딱충'은 모두 지하철에서 사라져야 하나. 아이를 동반했다는 이유로 '엄마'는 커피도 마시지 못하는 '맘충'이 되는 건가.




인간 만사에는 '정도'라는 게 있다.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사연과 이유가 있다. 모두 각자 다르게 사고하고 행동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의 '특질'로만 선입견을 덧씌우고 혐오의 화살을 꽂는다면, 우리는 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맞는 걸까.


우리는 인간이라서 소통할 수 있다. 말을 할 수 있고, 생각을 할 수 있고, 공감과 이해란 걸 할 수 있다.  모두가 하나같이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 자신뿐 아니라 서로가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매일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인간이 성장하고 성숙해나갈 수 있는 '잠재성'일 것이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공유되고 그야말로 '까발려지는' 세상인지라, 우리는 매일매일, 더 많은 사건 사고와 깊은 한숨을 맞이하게 될 것이 자명하다. 그때마다 모든 걸 '극혐'의 렌즈 너머로만 바라 볼 요량이라면, 언젠가 본인에게 씌워질지도 모르는 '프레임'도 감수할 줄 알아야 하는 게 공평하다.




나의 아버지를, 한남충, 틀딱충, 개꼰대, 개아재로 받아들이고, 나의 아내를 맘충, 김치녀, 된장녀, 메갈로 받아들이고, 내 아이를 무력하고 꿈도 없는 지리멸렬한 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내 남자친구를 잠재적 강간범, 잠재적 데이트 폭력범, 살인자로 받아들여야 한다. 심지어 나 자신도, 개아재, 핵꼰대, 한남충으로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누가 나를 그렇게 미워한다손 치더라도, 할 말이 없어야 한다. 모두를 향한 내 '극혐'의 화살을 거두지 못한다면. 그럴 자신이 없다면, 그럴 깜냥도 안되면서 방향이 한참 잘못된 독화살을 아무에게나 쏘아대는 어리석음을 그만두는 게 맞다.


왜 나는 너를 미워하는가. 왜 너는 나를 미워하는가. 왜 우리는 서로를 '극혐 하는가'


나는 당신에게 '벌레 같은 존재'로 남고 싶지 않다. 내 존재 이유만으로 숨도 못 쉰 채 '한남충 살충제'를 맞고 '영혼의 소멸'을 겪고 싶지 않다. 내가 남자라는 이유로, 한국 남자라는 이유로 당신에게 '바퀴벌레'만도 못한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 나는 오늘도 '어제보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안간힘을 쓴다. 한남충이란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매너를 지키며, 오해받을 일을 하지 않으려 '와칸다 포에버'자세로 지하철에 올라 혹에나 누구와 스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애초에 '여혐'의 감정도 없지만, 혹에나 성희롱, 성차별, 성폭행범, 여혐충으로 오해받을까 싶어 이내 하려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문다.





미워할 사람을 미워하고, 존중할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할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마음과 혜안이 우리 모두에게 있었으면 하고 소망한다. 약자를 보호할 줄 알고, 부당한 강자에게는 맞설 줄 알며, 권리에 따른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하며, 성 역할을 떠나, 나이를 떠나, 옳은 일을 옳다고 바라보고, 불의를 불의라고 정의 내릴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싶다.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는 이유로, 정세랑 작가의 '옥상에서 만나요'를 읽었다는 이유로, 보는 내내 소름이 끼치고,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되어 뼈아프게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는 이유로, 그래서 '여성들'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게 되었다는 이유로, 무언가 미안한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꼴페, 개극혐, 남자의 적'이 되는 세상에 사는 건 우울하고 불행하다.


내가 '극혐'하는 틀딱충, 내가 '극혐'하는 '김치녀', 내가 '극혐'하는 '꼴페미', 내가 '극혐'하는 '개꼰대', '개저씨', 내가 '극혐'하는 '책따'가 우리의 부모이자, 아내이자, 어머니이자, 애인이자, 여동생이자, 형이자, 삼촌이고, 내 친구이며, 조카고, 내가 세상 무엇보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 딸일 수 있다.  


'극혐'이 '극도로 어려운' 세상에 살고 싶다. 인간이기 때문에.  비단 이것이 나만의 절박한 소망은 아니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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