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은 - NONE
존경하는 뮤지션이자, 좋은 노래를 짓는 친구 지은이는, '비루한' 내가 정말 형언하기 힘든, 아득하고도 깊은 감수성을 갖고 있다. 지은이가 꾹꾹 눌러 그려가는 멜로디, 바라보는 세상, 그녀가 전하는 메시지, 표현하는 단어 하나하나에는, 나의 폐부를 깊숙이 찌르는 것 같이 '헉'하게 만드는, 강렬하고도 묘한 힘이 있다.
그것이 힘을 뺀 가사든 힘을 준 가사든, 감정이 폭발하는지 무덤덤한지 따위를 곱씹어보는 건 무의미하다. 애초에 무지하고 몽매한 나는 그 깊은 세계를 헤아릴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내가 심각한 고민이 있거나, 가끔 깊은 나락에 빠져 있을 때, 지은이는 딱 한마디로 나에게 위안을 준다. 숨을 고르고 두어 번 머뭇거리다가 내게 꺼내는 그 한마디가, 나에겐 특효 처방약이다. 그런데 그건 참 소름 끼치는 일이기도 하다. 오늘 낮에 든 상념마저도 깔끔하게 오와 열을 맞추고 잠들지 못하는 내게, 타자의 '한 마디'가 '명료'한 그림을 보여주는 순간, 나 자신의 '미성숙함'과 '치기'에 대한 부끄러움을 맞닥뜨리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은 매번 일종의 '쓴맛'인 걸 고백하지만, 언제나 나는 달콤한 해방감을 얻는다. 그도 그럴 것이, 지은이가 꺼내는 말에는 언제나 '반창고'가 붙어 있다. 내가 친구라서가 아니라, 지은이는 애초부터 세상에 대한 '온기'를 지그시 유지할 줄 아는 '그릇'을 가졌다.
때로 나는 지은이를 무척 걱정한다. 지은이가 보듬고 갈고 갈아 진주처럼 꺼내놓는 감정들은 실로 모든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지만, 때론 지은이가 그렇게 토해낸 고통 위에 '반창고'처럼 덧붙일 '청자의 상호 위안'이, 지은이에게도 필요한 것 같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삶과, 사랑과, 인생과, 대상과, 희미하고도 아득한 저 너머의 안개 같은 것까지 고민하고, 허무함을, 비루함을, 무정함을 노래한다. 연결성이 다분한 인생을 갈고 빻아, 언제나 날것으로 꺼내놓는다. 나는 지은이가 '거짓'을 노래하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런 지은이가, 얼마나 수많은 밤을 갈아내듯 노래하는지 조금은 미루어 짐작할 것 같기에, 가끔은 내 입이 텁텁하다.
'할 말이 없는 이야기'로 '할 말'을 전한 지은이의 싱글이 6년 만에 발표됐다. 105개의 단어로 만들어 낸 'NONE'. 이제 유별나게 '할 말이 없어진 것이 할 말'이라고 얘기하는 지은이가, 결국은 '할 말 없음'으로 듣는 사람들에게 '할 말'을 전했다.
나는 지은이가 가사를 쓰는 마음이, 언제나 참 예쁘다고 생각한다. 비루함, 무정함, 명료함, 피고 질 것을 노래하는 마음. 이 표현 하나에, 단어 하나에 얼마나 많은 생각이 꽉 찬 공기처럼 들어차 있는지, 나는 역시 미처 헤아릴 수 없다. 다만, '죽' 삶에 대한 노래를 해왔던 지은이가, 6년 만에 싱글을 내면서 '오늘도 힘든 하루였고, 산다는 것은 무얼까'에서, '오늘 하루도 무사했고, 살아있는 건 무얼까'를 되짚는 '전진'은, 나에게 은근한 안도감을 준다. 결국 이렇다 할 할 말도 없는 삶이란 것이, 생이라는 것이, 살아 있음으로 조금씩 물감처럼 번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우리는 오늘이 그랬던 것처럼, 내일도 그저 무사하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겠다. 유달리 이렇다 할 말이 없는, 그런 하루를 보내게 될 것이다. 내가 여전히 '살아있는 찰나'에도 그 어떤 것은 '또 피고 질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은 지나갈 것이다. 비루한 나를 남겨두고. 가끔은 살만하다 느끼는 그 순간에도 어떤 것은 질 것이며, 가끔은 무정하기 짝이 없는 하루 속에서도, 나의 '살만함'은 잠시 피어오를 것이다. 그런 무정하게 느껴지는 하루가 또다시 피고 질 것이다. 나를 감싸고 휘감다가 흩어질 것이다.
싱글이 발매되었던 5월 9일 5시 12분, 마치 60분 느리게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로 가득한 것 같았던 쿠알라 룸푸르 시내 한복판. 혼잡한 거리를 걷다가 에어팟을 끼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홍갑의 정연한 기타 소리, 말끔하고 담담한 지은이의 목소리, 정갈한 노랫말 때문에, 기차역 한가운데에 멍하니 그대로 서 있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은 그렇게 지나갔고, 그대로 간직하고 싶었던 멜로디도 다 지나가 버렸고, 3분 30초의 나지막한 읊조림도 지나갔다. 갖고 있고 싶은 것들.
열심히 '죽' 노래를 하는 지은이가 '할 말 없음'으로 '할 말'을 들려주었다. 그동안 우리가 '죽 함께 살아가고 있었음을' 명료하게 전해주었다. 이렇게 노래를 지어낸 지은이가 자랑스럽다. 특히, 'NONE'이라는 제목을 붙인 지은이가 더욱.
갖고 있고 싶은 이 위안과 위로를, 끝없이 반복 재생하는 것 말고는, 피고 지는 나의 하루를 위로할 마땅한 무엇은 당분간 없을 것만 같다.
모든 것은 지나가
갖고 있고 싶은 것들
비루한 나를 남겨두고
모두 지나가네
아주 가끔 세상이
명료하게 보일 때가 있지
비루한 나의 눈에도
아주 잠시뿐인
눈을 뜨고
오늘 하루도 힘들고
산다는 것은 무얼까
나는 이제 할 말이 없어
아름다움 속에서도
무정함 속에서도
나는 이제
허무함을 노래해
피고 질 것을 노래해
열심히 삶을 노래해
죽 노래를 해
아주 가끔 세상이
살만하게 보일 때가 있지
비루한 나의 눈에도
아주 잠시뿐인
눈을 뜨고
오늘 하루도 무사했어
살아있는 건 무얼까
나는 이제 할 말이 없어
아름다움 속에서도
무정함 속에서도
나는 이제
눈을 뜨고
오늘 하루도 무사했어
살아있는 건 무얼까
나는 이제 할 말이 없어
아름다움 속에서도
무정함 속에서도
나는 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