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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인의 청춘 Nov 29. 2018

삶과 인생

살아있으므로

삶이란 아래의 의미와 같다.  

출처: 네이버 어학사전

인생이란 아래의 의미와 같다.

출처: 네이버 어학사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물론 시의 일부분이지만- 라든지,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이라든지 하는 말은, 무엇에 빗대어 할 수 있는 말일까. '인생이 왜 이러나'라는 한탄이나, '내 삶은 도대체 왜?'라는 생각은 무엇을 기준으로 두길래 하는 말일까.


'나의 생명이 나를 힘들게했다, 나의 목숨이 나를 속였다'라는 말인가 아니면, '나의 생명은 왜 이런 모양일까'라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내 목숨은 왜 이런 식일까'라는 말인가.


그 무엇도 자연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살아있음'은 어떤 상태일 뿐이지, 본디 '살아있는 상태'로 인해 고통이 발생한다는 건 인과관계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살아있어서 고통을 '느끼거나 겪을' 수 있지만, 반대로 살아있기 때문에 행복과 기쁨도 느끼고, 누릴 수 있다.


죽으면 고통이 없지 않냐고 말한다면, 반대로 죽으면 그렇게 좋아라 하는 행복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이 거짓이라면, 살아 있으니 행복해야 하고, 죽은 뒤엔, 살지 못하니 불행하다는 말도, 성립되야 옳다. 과연 그러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죽었으니까, 느끼지 못하니 고통스럽고 불행해도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면, 명복은 왜 빌게 되는 걸까. 고통도 행복도, 그 어떤 것도 느낄 수 없는데.




삶, 즉 '살아있음'과 별개로, 우리가 받아들이길 회피하는 고통이란, 이미 살아있음으로 언젠가 맞닥뜨리거나 경험할 수 있는 감정이나 상황이지, '내가 지금 살아있다는 이유'로 느끼는 감정은 아니다.


반대로 살아있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과 기쁨도 느끼며, 감동과 환희에 벅차기도 한다. 이 역시 '이미 살아있음'으로 느끼는 경험이나 감정이지 '내가 지금 살아있는 그 이유' 때문에 반드시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필연적 고통이 찾아오는 순간마저 정말 행복하다고 느끼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 어느 누구의 인생도 행복으로만 가득한 걸 본적이 있는가.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 아기도 졸리고 배고플땐 '운다'.  


그렇다면 고통은 없어야만 하는 것인가. 우리 삶은 행복으로만 가득해야 하나. 일분일초 현실에 살을 부벼대며 사는 인생에서 지극히 궤도이탈한 이런 소망은, 그저 그렇게 이뤄짐이 감사하고 고마울 뿐, 잘 생각해보면, 마땅히 느끼거나 받아야만 하는 속성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고통도 당연히 마땅하지 않다.


결국 행복도 고통도 '마땅하다'고 표현할 성질의 것들이 아니다. 고통이나 행복은 그저 있다가 없는 것, 지나가는 것, 왔다가 사라지고, 다시 느꼈다가 또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내가 살아있는 이유로 이렇게 고통스럽다고 생각한다면, 반대로 죽어야만 행복을 느낄 것인가. 그 뒤를 누가 알겠는가. 그저 그럴 수 있길, 누구나 소원하고 빌뿐이다.




인생은 '살아있음'이다. '비참하게 살아있음', '잘 살아있음', '고통스럽게 살아있음', '행복하게 살아있음'도, 살아있다는 상태를 여러 빛깔로 색칠하는 표현일 뿐이지, 비참함, 고통스러움, 행복함 등이, 인생 본연의 완벽하고 무결한 속성일 수는 없다.


결국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있음'만 우리의 선택으로 남는다. 너에게나 나에게나 가감없이 '살아있음'이 동일하게 주어져, 지금 우리 모두 이렇게 살아있는 거라면 - 그래서 이 글을 쓰고 읽고 생각할 수 있는 거라면-,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 고민하는 것이 나만의 선택이다. 그걸 '어떻게 색칠하고자 하는가'에 집중해야 옳다.


어떤 사람이 살았다, 죽었다를 말하는 Dead, Alive가, '상태'를 말하는 Be동사Be Verb와 같이 쓰이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는, 지금 '살아 있다'.




삶은 나를 속인 적이 없다. 아니, 삶은 나를 속일 수가 없다. 애초에 '살아있음'이 내게 어떤 추악한 음모를 꾸며서 나를 지독하게 걸고 넘어질 수는 없는 일이다. 내 인생이 이 모양인 건 그저 주어진 것도, 이미 정해진 것도 아니다. 결국 내 삶은 왜?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이다.


인생이 쓰디 쓴가. 그럴 때 많은 사람들은 '내 인생은 왜? 인생이 대체 나에게 왜 이러는가?'라고 생각한다.


인생이 순탄한가. 그렇다면 그야말로 때마침 인생이 특별히 나에게 잘해주는 것인가.


행복해 겨워 '요즘 내 인생은 왜 이렇게 행복하기만 해?'라며 '능동적으로 느끼는' 사람은 봤어도, '요즘 내 인생이 나에게 너무 잘해준다'라며 피동적으로 좋아라 하는 사람은 본적이 없다. 힘들 때만 피동적이고, 좋을 때만 능동적인건, 누가 생각해도 비겁하다. 좋은 건 내탓, 싫은 건 남탓인 셈과 다를 바 없다.




마지막으로, 나는, 지금 행복해서 이 글을 쓰는게 아니다. 불행해서 쓰는 것도 아니다. 내가 잘 되서 쓰는, 뭐가 못 되서 쓰는 글도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글이다. 그냥 쓴다. 살아있으므로.


지루한 주제다. 그런데 3개월 동안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 그래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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