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은 떠돌며, 어디로 가고 싶은 걸까, 6월 20일.

세계 난민의 날

by 이주현

그리 자주 이사 다닌 것은 아니어도, 초등학교 시절의 2번의 이사는 예민한 시기에 큰 영향을 주었었나 보다. 서울의 작은 아파트 동네는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같이 어울리던 무리가 있었고, 내가 허락받을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다. 억지로 학원을 다니거나 과외를 같이 한 적이 있었지만 언제나 그 자리가 불편했고, 그 때마다 서점이나 문방구점, 낡은 상가의 지하 상가를 정처없이 돌아다니며 혼자 다른 생각을 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친구’라는 관계에 회의감을 느꼈던 시절이었다. 중학교 당시 그런 나와 비슷한 친구들 몇 명과 자주 시간을 보냈어도 ‘글쎄, 우리가 친구라고 할 수 있을까’와 같은 가시 돋힌 말만 꺼냈고, 모든 것이 나와는 다르고 특별해서 질투와 동경의 마음을 모두 가졌던 ‘그녀’에게는 ‘왜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없을까’와 같은 미친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만 했으니, 그 시절 나의 ‘외로움’은 내가 자처한 것이었다.


부모님이 원하는 것의 딱 반대로만 행동하던 그 때. ‘여기’에서 도망친다면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자주 공상에 잠겼다. 나를 아무도 모르고, 그들이 누군지 모르는 그런 세계가 있다고 생각했고, 다른 동네에 있던 고등학교 진학을 선택한 것의 절반의 이유는 그것이었다. 이후로 나는 자주 도망쳤다. 불확실한 것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도망쳐서 달아난 그 곳에 정답은 없었다. 늘 도망치다 실패했어도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그렇게 몇 번, 앞뒤좌우로 방향을 바꿔가며 아슬아슬 살아왔다. 언젠가 어디로도 내가 갈 곳이 없다고 느꼈을 때, 그 때 쓰던 블로그 프로필 설명 글은 ‘가로막혀 있는’ 이었다. 그렇게 ‘가로막혀 있는’ 방구석에서 오래도록 견디며, 이 시간과 이 공간이 내게 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어렸을 때는 무조건, ‘여기’보다 나은 ‘거기’가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거기’는 어디에도 없고 결국 ‘여기’를 살아가는 것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의 뒷면에는, 이제는 도망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 모두는 그 양면의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결국엔 우리의 생이 여기서 시작되고, 여기서 끝날 것임을 잘 알고 있다. 도망치지 못해서 나약했던 것도 아니고, 도망치지 못하고 순응했던 것도 아니며, 열심히 앞을 향해 걷고 있다 생각했지만, 뒤돌아보면 대부분의 시간을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었나 보다.


결국 우리들은 어디로도 갈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뭔가 대단한 것을 향해 ‘나아가기’위해 살기 전에, 지금 여기에서 ‘함께 잘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그것을 나무에 대한 시를 학생들과 같이 읽으면서 알았다.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치지 못하는, 비와 벼락을 모두 감당하며 자리를 지키는, 일 년에 한 번 나이테를 몸에 새기며 살아가는 삶. 때로는 꽃을 피우기도, 때로는 앙상한 나뭇가지로 추위를 버티기도 하는, 잠시 새와 바람이 쉬었다 가기도, 더위에 지친 이들이 그늘 속에서 잠시 쉬었다 가기도 하는. 그러나 우리는 다만 한 그루의 나무만도 못한 삶을 살고 있기도 하다.


사람들은 그저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것 뿐이라, 앞만 보면서 산다. 눈 앞에 보이지 않으면 없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자신의 정체성을 담은 이름표를 붙이고 다니지 않는 이상,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데도, 쉽게 판단하려고 한다. 죽을 때까지 자기 주변에서 성소수자는 한 명도 없었다고 당당히 말하고 생각하려나. 그저 목발을 집고 기브스를 하고, 지팡이를 짚고 다니지 않는 한, 그가 어떠한 장애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거나. 그러니 우리들 눈 앞에 난민들이 몇 백명씩 떼지어 몰려오지 않는 이상, 우리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 뻔하다. 우리와는 상관없는 문제이며, 이 문제와 관련있는 당사자들이 해결하면 될 일이라고 쉽게 생각할 것이 뻔하다. 나무는 자신의 그늘 밑으로 들어오려는 그 어떤 생명체들도 거부하지 않는다. 그저 그 모든 것과 어울려 살 뿐.


도망치다 실패하면 죽는 삶이 있다. 아니, 도망치지 않으면 죽는 삶, 이미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삶이 있다. 아마 태어나면서부터, 그 출발점이 너무나 죽음에 가까이 있어서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삶.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근원에는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 대한 돌이킬 수 없는 절망감이 있다. 그 절망감에 대해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어렸을 때는 무조건, ‘여기’보다 나은 ‘거기’가 있다고 믿었다. 지금은 ‘여기’보다 낫지 않은 ‘거기’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리고, ‘여기’는 ‘거기’가 되고, 또 ‘거기’는 ‘여기’일 수도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들의 삶이 불행하다면, 그렇다면 우리들의 삶은 행복한가. 폭풍우치는 바다 한 가운데 표류하고 있는 삶. 한 쪽은 실제이고, 또 다른 한 쪽은 비유일 뿐이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삶이 물리적인 것만 문제가 되겠는가. 우리는 때때로, 자주,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생각과 마음으로 고통스럽다. 그러니 우리들이 할 일은, 그저 그 두 세계가 만나는 것일 뿐. 실제로 만나지 못한다면, 책을 통해 만나는 것도 큰 의미가 될 것이다. 눈 앞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 그러한 삶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상상해 봐야 한다.


그리고 자주 ‘우연’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지금 이 시기에 태어난 것, 이 나라에 태어난 것, 이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 누군가를 만나고, 대화하고, 시간을 보내는 것. 이 모든 시간과 공간들, 이 모든 생의 순간 순간들이 우연에 불과하며, 내가 죽으면 이 우연의 조각들은 다만 찬란히 흩어질 뿐이라고. 그리고 지금 이 우연의 카테고리 안을 살아가는 내가 유일하게 소망할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이 앞으로 겪을 우연의 조합이 더 비참해지지는 방향이 아니길 바라는 삶. 우연의 조각들을 조금씩 비틀어, 그것들의 조합이 조금은 나은 것이 되길 바라는 삶이 아닐까.




<6월 20일 세계 난민의 날> 추천도서 : 청소년 문학 중심으로


1. 초콜릿어 할 줄 알아? / 캐스 레스터

유쾌한 재즈의 삶을 들여다 보며, 자주 웃었다. 어디서든 학교의 일상은 비슷하구나. 난민인 '나디마'가 등장했어도 그가 영어를 할 줄 모른다는 것 외에는 별 문제 없어보이는 일상이 신기하기도 했다. 친구들 간의 오해와 화해 스토리는 뻔하다고 생각할 즈음, 왈칵, 하고 먹먹해 지는 순간이 있었다. 종이 가득 펼쳐진 가계도, 수십 명이나 되는 대가족 규모에 재즈가 미처 놀라기도 전에, 그 위에 D를 계속해서 표시하는 나디마의 작은 손. 아픔을 공감한다고 말하기엔 너무나 엄청난 일들이, 그 나라에는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2. 난민들 / 아넬리즈 외르티에

두 가지 이야기가 교차되는데, 역시 우리들은 전혀 다른 경험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여도 본질적으로 인간으로서 똑같은 일을 겪는 것 뿐이구나, 라는 것을 문득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다들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하고, 내가 이 세상에서 제대로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큼 이 지구의 모든 인간들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 가까운 이의 죽음이 나를 그토록 나의 삶을 변화시키면서 동시에, 나와 아주 멀리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죽음 또한, 같은 의미로 나의 삶을 변화시키는 큰 울림이 된다는 것. 짧지만 아름답고 슬프고 강한 소설이었다.


3. 난민87 / 엘르 파운틴

역시 너무 괴로워서 읽기 힘들었다. 왜지? 왜 이들은 이토록 말도 안되는 상황에서 고통받아야 하지? 어째서 이들은 이렇게 용감하기도, 덤덤하기도 한 걸까. 세상의 끝에서 도망치면 세상의 시작이 눈 앞에 펼쳐질까. 이 책은 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읽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4. 어느 날 난민 / 표명희

한국이 배경인 이야기를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여러 등장인물과 여러 상황이 정신없이 얽혀있긴 하지만, 결국엔 그렇다. 이 나라에도 이토록 떠도는 사람이 많다는 것. 다들 그렇게 애써 서로의 옷깃을 붙잡고, 애쓰지 않은 척 애쓰며 살아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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