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들여야
공간을 이해할 수 있어요

[시간이 더해진 공간의 의미를 묻다 #001] 유현준 건축가

by 공공그라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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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준 건축가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공간을 말하는 중이다.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며 공간을 만들고, 홍대 건축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알쓸신잡2> <어쩌다 어른> <두발라이프> 등의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책을 쓰고, 팟캐스트를 한다. 이제야 비로소 우리만의 공간 안목과 문화를 만들어나가야 할 때라고 말하는 그는, 주변의 공간을 돌아보고 사유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말을 건넨다.


글, 영상_콘텐츠매니저 여름



자기의 관점으로

기억을 편집해 볼 필요가 있어요


유현준 교수의 건축사사무소는 주택가가 늘어선 골목길 안쪽에 있다. 건물의 1층은 회의실로, 4층은 사무실로 사용한다. 통유리로 둘러진 1층 회의실 바닥에는 푸릇한 잔디무늬의 매트가 깔려 있고 한쪽 벽면엔 책이, 널찍한 창문 앞으로는 반투명 커튼이 쳐져 있다. 커튼 뒤로 지나가는 차와 사람들의 실루엣이 보인다. “창의적인 생각이 나오는 높은 천장" “생각할 여유를 주는 비어있는 공간"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창고 공간" 유현준 교수가 책에서 소개한 차고의 공간과 비슷한 풍경의 회의실이다.


“저에게는 이 1층 회의실이 의미있는 공간이에요. 1층에 지나가는 자동차와 행인들을 볼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이에요. 주차장 한 라인 뒤에서 반투명 커튼을 치고 밖을 훔쳐볼 수 있어요. 카페에 앉아 있는 느낌이 들면서도 조용히 있을 수 있는 공간. 그러면서도 문을 투명하게 만들어서 오가는 사람들도 저를 볼수 있게 해서, 느슨하게 바운더리 쳐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저에게 중요합니다.”


Q. 회의실을 둘러보니 교수님이 책에서 쓴 차고의 느낌과 비슷하네요. 염두에 둔 건가요?


“찾다보니 그렇게 됐어요. 차고에서 창업이 많이 일어나는 것도 그런 공간적 요소가 영향을 줄 거예요. 차를 빼면, 어느 공간이든 될 수 있고 길가 옆에 있는 공간이잖아요. 선택에 따라 사적인 공간이 될 수도 있고, 밖을 볼 수도 있는 공간이죠.”


Q. 교수님이 지나온 시간 속에서 의미있는 공간을 꼽자면 어디가 먼저 떠오르세요?


“네 살 때부터 초등학교 4학년까지 살았던 구의동 주택이요. 2층 양옥집인데 그 집의 마당 공간이 저에게는 중요한 공간 경험이었어요. 그네도 있고 연못도 있고 마당이 있는 집이었는데, 초등학교 2학년 때 대대적으로 생활 풍경이 바뀌면서 집도 바뀌었어요. 화장실을 개조하고 좌변기가 바뀌고. 샤워하는 문화가 생겼어요.


아버지가 차를 사면서 마당이 주차장으로 바뀌었고, 연못이 사라지고 시멘트 바닥이 깔렸어요. 삶의 변화를 직접 체험해본 공간이라 건축가로써 중요한 경험이었어요. 4학년 때까지 살다가 5학년 때 아파트로 이사를 갔어요. 단계별로 제 삶에서 주거 환경이 계속 바뀌어 갔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했던 공간을 찾는다면 구의동 주택의 마당이라고 생각합니다.”


유현준 교수님은 이번 인터뷰 제안이 더없이 반가웠다고 전했다. 최근에도 공간 이야기를 하면서 사람들이 생각보다 자기 주변의 공간, 서울의 공간을 잘 모르고 있다는 생각에, 이 인터뷰와 비슷한 주제인 ‘나에게 소중한 공간'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고 했다. 최근에 『당신의 별자리는 무엇인가요』라는 책으로 출간됐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터전을 사랑하는 방법을 자신의 경험을 풀어 담아낸 책이다.


“아마 그 집에서도 좋은 기억도 있고, 나쁜 기억도 있겠지만, 대부분 좋은 기억들이 기억나게 되죠. 인생의 가치는 자기 추억의 무게와 양으로 결정이 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자기의 기억을 자기 관점에서 편집해볼 필요가 있어요. 예전의 공간이 나에게 어떤 공간이었는지, 지금의 공간은 나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좀더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어요.”


다다다.jpg 유현준 건축가



나만의 공간 리스트가 필요해요


Q. 우리 삶에서 의식주가 다 중요한데요. 의()는 쇼핑으로 식은 먹방으로 즐길 수 있는데, 집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공간의 즐거움을 충분히 누릴 수 있을까요?


“음식은 5000원짜리라도 잘 골라먹으면 행복할 수 있고, 옷도 싸고 좋은 것들이 많은데 건축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제일 돈이 많이 드는 일이잖아요. 공간 하나를 내 것으로 만드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요. 그래서 공공의 공간이 많아야해요. 유럽에도 청년들의 삶이 어렵지만, 그들은 수백년 전부터 내려온 건축 유산이 많기 때문에, 그걸로 즐길 수 있는 요소가 많고 그런데서 보고 경험한 것들이 많아서 우리보다 공간에 관한 이해도와 안목이 높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제야 굶어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시기가 됐다고 생각해요. 유럽같이 만들 수 없는 우리의 역사가 있었고요. 조선 말기때만해도 온돌방에 살다보니 다 단층집을 지을 수 밖에 없고, 고밀화된 도시가 아니고 근대도시에 적합하지 않아서 새롭게 만들려면 다 부수고 만들어야 했어요. 이제부터 수준을 높여야 하는 단계죠. 안목을 키워나가는 태동의 단계라고 생각해요.


요즘 사람들은 해외여행도 자주 가고, 공간이 주는 소확행에 대해 많이 생각해요. 그 계기가 SNS 덕분인것 같아요. 예전에는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소비와 소유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풀빌라를 사지는 못하더라도 사진한장 찍어서 올리면 내것처럼 되는 거잖아요. 사람들이 완벽한 소유는 못해도 시간당으로 소유하면서 즐기기 시작하는 거죠. 그러면서 점점 안목도 높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Q. 당장 소유할 수도 없고, 여건도 충분치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이 주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무엇이 있을까요?


“나와 공간의 매커니즘을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휴대폰 보면 음악 플레이리스트가 있잖아요. 내가 기분 나쁠 때 듣는 음악이 있고, 기분 좋을 때, 쉴 때, 나의 기분에 따라서 찾는 음악이 다르단 말예요. 음악과 나의 관계를 아는 거죠. 그런데 공간에 대해서는 내가 우울할 때 찾는 공간, 기쁠 때 찾는 공간. 그런 게 별로 없어요. 어떤 공간이 나한테 어떤 기분을 주는지. 상관관계에 대해서 잘 모르는 상태인 것 같아요.


짠 거 먹으면 혈관계 안좋고, 무슨 비타민이 뭐에 좋은지 많이들 알잖아요. 그런 관심을 공간에도 쏟아야 해요. 시간을 들여야 공간을 이해할 수 있는 거거든요. 어디 가봤냐. 어디 핫플레이스다. 어떤 공간이 색다른 체험과 경험을 준다는 것을 우리도 이제 조금씩 알기 시작한 단계인데, 조금더 커스터마이즈 되어야 하는 거죠. 맛있는 것도 누가 이미 정해준 것 같은 맛집 기행 리스트나 핫플레이스 말고, 내가 좋아하는 것,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을 찾아내는 게 중요해요. 그러려면 관심을 갖고 시간을 들여야 하는 거죠. 경험도 많아야 하고.”



집 앞에 안쓰는 의자를 놔주세요


Q. 좋은 공간의 의미가 여러가지 있겠지만, 건축가님이 지향하는 좋은 공간은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많은 요소들이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화목한 공간이 좋은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건축적으로는 서로 마주보고 소통할 수 있으면서, 프라이버시가 적당히 보장되는 공간 구조가 화목을 이룬다고 생각하고요. 사람들과의 관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까지 화목하게 하는 공간이 좋은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Q. 건축가님의 책에서 ‘좋은 건축을 만들기 위해서 나부터 좋은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더 나은 공간, 더 나은 도시를 위해서, 어떤 일을 시도하는 것이 시작이 될까요?


“여러분의 집에 놀고 있는 의자가 있다면, 여러분이 있는 건물 앞에 놔 주시길 바랍니다. 공짜로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구석구석에 만들 수 있다면 그게 우리 세상을 조금씩 좋게 만든다고 생각해요. 버려진 벤치같은 게 있다면 자기 빌딩 앞에 가로수와 가로수 사이에 놓는식으로요.


그런 사소한 공간이 쌓이다 보면 이 도시가 엄청나게 풍요로워질 거라고 생각해요. 주변의 공간을 그렇게 꾸밀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테라스에 화분 하나라도 가져다 놓는 일이죠. 백 명의 사람이 테라스에 화분을 하나씩 놓으면, 백 군데 좋은 곳이 생기는 곳이고, 천 명이 의자를 놓으면 서울에 천개의 벤치가 생기는 거예요. 거기서부터 도시의 풍경이 바뀔 거라고 생각해요.”



시간을 보낸 공간도 그 사람을 만든다.(..) 유년 시절에는 수동적으로 공간들을 만났고, 성인이 되면서 점차 나에게 맞는 공간을 찾아다니거나 머무는 곳을 꾸미거나 건축가로서 새로운 공간을 만들기도 했다. 어려서 주어진 부모와 형제는 바꿀 수 없지만, 나이 들어서 만나는 친구와 책과 영화는 선택할 수 있다. 공간도 마찬가지다. - 『당신의 별자리는 무엇인가요』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