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더해진 공간의 의미를 묻다 #002] 김진애 건축가
도시 건축가 김진애 박사는 매일을 왕성한 에너지로 산다. 저녁마다 라디오 시사 토론의 진행을 맡아 온갖 이슈를 챙기고, 공간과 건축 이야기를 계속 말하고 쓴다. 그는 "자기 안에 예전에 쌓은 지식을 푸는 일"이라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했다. 그 바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공간 감수성, 자기 감성을 놓치지 않는 비결이다. 그가 말하는 공간도 비슷하다. 시간을 쌓고, 이야기를 쌓은 공간이 사람에게 여유를 주고 안정감을 준다. 어떤 공간의 가치는 건축가도 자본도 아닌, 시간이 만들어낸다.
글, 영상_콘텐츠매니저 여름
Q. “바로 지금 사는 이 집에서 요모조모 궁리하고 이모저모 실행해 보는 자체가 '집 놀이'다”라고 말하는 에세이를 출간하셨어요. 『집 놀이』의 구절 중에 '지금 시대에 맞는 공간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지금 시대에 구체적으로 어떤 공간 이야기가 필요할까요?
“우리 사회가 많은 발전이 있는데, 사람들의 공간 감수성만은 약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공간 감수성이 생기면 창의성이 높아지고, 입체적인 사고가 늘어나지만, 무엇보다 행복을 느끼는 능력이 굉장히 향상되거든요.
굉장히 빨리 바뀌는 시대잖아요. 사이버상에서 이루어지는 게 너무 많고, 아날로그가 곧 사라져버릴 것 같지만, 저는 인간만큼은 그렇게 빨리 바뀌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여전히 수렵 채집 시대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수렵 채집 시대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공간 감수성입니다. 그걸 잃어버리면서 행복해하는 능력도 많이 잃어버렸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Q. 어떻게 하면 공간 감수성을 키울 수 있나요?
“많이 걷고 길을 많이 잃어봐야 해요. 요새는 길을 잃지도 못하게 하잖아요. 휴대폰으로 검색해서 바로 그 장소로 가버려요.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우리는 방향감각도 찾고, 위치도 찾고, 공간 감수성도 얻을 수 있어요. 수렵 채집시대에 왜 공간 감수성이 필요하냐면, 위험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거든요. 여기서 뛰어내려도 되는 거냐. 도망을 가야 하나. 적과의 거리는 얼마큼이냐. 어디에서 자야 숙면을 취할 수 있는 거냐. 이런 감각을 깨워내는 게 중요하죠.”
김진애 건축가는 덧붙여 '길 잃기'를 즐길 수 있는 자신의 여행법을 이야기해주었다. 그가 글로도 방송에서도 소개했던 자기만의 '점, 선, 면 여행법'이다.
"점, 선, 면을 대충 그려두는 것은 아주 유용하다. 점이라면 특정한 건물이나 랜드마크가 되는 광장 같은 곳이다. 선은 길게 늘어선 거리다. 어느 도시에나 유명한 거리가 꼭 있게 마련이다. 면은 동네다. 특색 있는 색깔을 가진 동네가 곳곳에 있따. 이미 모든 독자들은 나름대로 점, 선, 면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을 것이다." (『인생을 바꾸는 건축수업』) 이런 자기만의 지도로 세계를 인식하고 길을 찾을 수 있다는 얘기다. 길을 잃어볼 수록 자신의 지도는 선명하고 풍성해진다고, 김진애 건축가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Q. 박사님 일상에서 의미 있는 공간이라면 어디일까요?
“공간을 전문으로 하는 건축인이라 하나를 꼽을 수가 없어요. 저는 길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요. 뭔가 여러 사람이 덧대고 고쳐서, 설계로는 딱 만들어지기 어려운 공간을 좋아해요. 그게 골목길이죠. 달동네 능선과 수직계단도 설계로는 다 할 수 없어요. 인사동 길은 나뭇가지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건축가들도 그렇게 설계 못 해요. 그런 데서 영감을 많이 얻습니다.
인사동에서 건물 자체는 썩 중요하지 않아요. 건물은 보존은 하되 다시 짓게 되더라도 잘 지으면 되지만, 길은 다 보존해야 해요. 싹 쓸어버리는 일이 나쁜 게 길의 흔적을 지우기 때문이거든요. 길에 얽힌 이야기를 남기고 기록하고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Q. 그렇게 보존해야 했는데, 아쉽게 사라진 길이 있다면 어딘가요?
“제가 여행 다니면서 발견한 공간이 굉장히 많은데, 그중에 하나가 대구읍성이에요. 일제강점기 때부터 지어진 후 계속 덧대어져 세 블록 정도 있었는데, 없어졌어요. 복원한다고 하는데. 그걸 보면 처음엔 어느 건축가가 시작한 것 같아요. 그다음에 누군가가 덧대어 지었는데, 안이 미로처럼 되어 있고 너무 근사한 공간이더라고요.
지방도시에는 그런 공간이 꽤 있는데, 사십 몇 년 가지고는 보호 문화재로 지정이 안 되잖아요. 또 민간의 괜찮은 건물도 보호재로 지정되기 쉽지 않고요. 아깝지만 내가 다 사서 보존할 수는 없으니까.”
Q. 그런 공간을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없습니다. 공공에서는 세금으로 보존하는 거니까 역사적으로 기록에 남길 만한 공간을 열심히 찾아서 보존해야 하는데, 민간에서는 딱히 방법이 없어요. 거기서 수익을 창출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인사동은 지금도 재개발 지역이에요. 한옥을 보존하는 재개발 구역이 있는데 풀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방치되어 있는 곳도 있지만, 다시 쓰이고 있는 한옥이 있죠. 그런 건 왜 살아남았느냐? 예전과 달리 (한옥에서) 장사가 되니까요. 결국 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보존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 공간도 사라질 수밖에 없어요.
저는 모든 걸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가령 유럽에서 많은 것들이 몇백년씩 가지 않느냐고들 하는데 그건 석조 건물이 많기 때문에 200년 후에도 그 안을 리모델링할 수 있어요. 우리의 경우에는 한옥 정도? 한옥은 마음 먹으면 리모델링이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민간에서 지은 것들은 오래가기 어려운 집도 꽤 많아요.
그런 것들은 서서히 시간이 가면서 바뀌는 게 좋은데, 싹 쓸어버리는 게 문제죠. 이제는 북촌이든 서촌이든 인사동이든 거기서 장사가 안되면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그걸 허물고 3, 4층 다세대 주택 짓는 게 낫거든요. 살아가는 공간들은 우리가 바뀌듯 그 공간도 바뀌어 나가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해요. 이왕이면 좋은 공간으로 바뀌어 가면 좋죠.”
Q. 박사님은 도시에 관해 자주 이야기를 하시잖아요. 좋은 도시를 만드는 좋은 공간의 성격이라면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요?
“김수근 선생이 지으신 게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샘터 사옥인 공공일호를 예로 들어 보면 그 건물은 일단 사람을 주눅 들게 하지 않아요. 길하고 말하는 건물이에요. 공공 일호는 길에 있는 사람들이 들어오게 하거나 지나가게 하잖아요. 도시에 말하지 않는 건물이 굉장히 많거든요. 또 건물을 보면 혼자 튀는 게 많잖아요. 도시형 건축은 자기 주변에 있는 것과 친한 건물이에요.
공공일호는 캐릭터가 없는 것도 아닌데, 튀지 않거든요. 옆에 있는 건물과 잘 어울려요. 이런 것들이 좋은 건물의 요소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짓기가 간단하지 않거든요. 이런 고민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이 도시에 이 길에, 내 옆 건물에 내가 어떤 자세로, 어떤 초대하는 마음으로 서 있으면 좋을까. 이런 고민이 필요해요.”
Q. 지금 여기에서 더 좋은 공간, 좋은 도시를 누리기 위해서 무엇을 시작해볼 수 있을까요?
“건축과에 처음 들어오는 학생들에게 늘 해주는 말이 있어요. 유명한 건축물을 찾아다닐 게 아니라 보통 사람의 눈으로 주변 건물을 관찰하고, 뭐가 좋은지 뭐가 나쁜지 얘기를 하라고요. 말을 하는 건물인가. 이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결국 가장 좋은 공간은 스토리가 있는 공간이에요. 건물이 말을 해야 소통이 되고, 시간이 쌓여 이야기될 수 있거든요. 스토리 없이 발언만 하거나, 나 잘났다는 공간은 길게 못가요. 어떻게 스토리가 있는 공간으로 시간을 축적해갈 것인가, 이런 공간을 함께 고민해보고 만들어갑시다.”
결국 좋은 공간을 발견하고, 누리고, 보존하기 위한 첫 단계는 내가 있는 공간의 관찰에서 시작된다. 관찰을 해야 말하는 건축과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우리 역시 공간에 관해 할말이 생긴다. 공간의 변화를 발견하고, 사람들이 공간에 관해 더 많이 이야기하고, 할 얘기가 자꾸 많아진다면, 단번에 싹 밀리는 도시의 풍경을, 그 변화의 속도를 조금은 늦출 수 있지 않을까? 공공그라운드가 내부 사람들과 외부 사람들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목소리를 축적해나가는 이유를 다시 한번 되새기는 만남이었다.
"항상 눈을 뜨고 온몸의 촉수를 열어놓고 관찰을 해야 생활의 면면이 보이고 그것이 노하우가 된다. 건축인은 다채로운 경험을 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런 관찰을 과연 건축인들만 해야 할까? 사실은 모든 사람들의 습관이 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들이 집에서 벌어지는 우리들의 삶에 관심을 가져준다면 우리들의 삶은 얼마나 더 풍부해질 것인가?" (『인생을 바꾸는 건축수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