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그라운드 텍스트클럽 02 <박연준과 소란> 리뷰
공공그라운드 "텍스트클럽"은 텍스트를 낭독하고, 텍스트 안팎의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입니다.
텍스트클럽의 멤버, '텍스트클러버'의 더 깊은 영감을 위해 책 너머 창작자의 생각과 나의 이야기까지 자유롭게 나눌 수 있는 시간으로 구성합니다. 다양한 감각을 활용하여 텍스트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이를 통해 텍스트를 '읽는' 일방향의 경험이 '읽고 나누는' 쌍방향의 경험으로 전환되기를 기대합니다.
글 | 우주
사진 | 난다 출판사, 공공그라운드
코로나19로 조심스러운 요즘, 행사를 기획하는 마음도 무척 무겁습니다. 그래서 40매의 티켓이 하루 만에 매진된 것이 놀랍고 감사했습니다. 참석하시는 분들의 안전을 위해 파랑새극장도 더욱 단단히 준비했습니다. 모두 조금 더 배려하고, 조심한 덕분에 두 번째 텍스트클럽 역시 무척 따뜻한 자리였어요.
여러 이야기들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채워지는 시간이었다. 떨어져 앉은 사람들 사이를 다정하게 채워주고 이어주는 이야기들이었다. (...) 공기 중에 물방울이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듯, 뿌연 여름밤에 마음이 촉촉해지는 시간이었다. (인스타그램 @greenday_jm)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진행이 돋보이는 유희경 시인님, 그리고 '소란한 어림의 순간'을 사랑하는 박연준 시인님을 모셨습니다. 산문집 <소란>에서부터 시작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박연준 시인: 저는 파랑새극장에 30년 만에 왔어요. 제가 예닐곱 살 때 여기가 '샘터파랑새극장'이었거든요. 고모와 인형극을 많이 보러 다녔어요. <피노키오>, <헨젤과 그레텔> 같은 것들요. 저는 마녀 때문에 객석에서 울고 난리 치는 아이였어요. (웃음) 그래서 여기가 너무 궁금했어요. 그때 굉장히 넓은 곳이었거든요, 제 기억에. 근데 지금은 아늑하다고 느껴지네요.
유희경 시인 (이하 '유'): 아, 그럼 여기서 낭독회를 하는 게 뜻깊은 일이겠네요.
박연준 시인 (이하 '박'): 네. 꼬맹이 때는 고개를 위로 들고 바라봤던 무대인데, 지금은 무대 위에서 인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네요.
텍스트클럽은 창작자 뿐만 아니라 '나'의 이야기까지 나눌 수 있는 쌍방향 프로그램이라고 소개드렸었는데요. 이번에도 텍스트클러버의 사연을 미리 받아 '마음속 소란스러운 순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선물로는 박연준 시인님께서 손으로 적은 엽서와 하이쿠 카드를 드렸습니다. 평소 책점을 즐겨 보시기 때문에 엽서의 문장 역시 같은 방식으로 골라오셨다고 합니다.
첫 사연으로는 '이별'을 다루었습니다. 이별 후의 요란하고 소란한 마음을 떠올리고, 엽서를 읽어주셨습니다.
박: '보고 싶어', 라는 말 있잖아요. 우리가 흔히 쓰잖아요, 전화하다가도 보고 싶다고 하고. 그런데 정말 누군가랑 만날 수 없어졌을 때, 그때 그 '보고 싶어'라는 말이, 보는 걸 하고 싶은 거잖아요. 그게 이별할 때 가장 절절한 거죠. 진짜 보고 싶은데, 그게 안될 때의 괴로움은... 옆에서 들어줄 수밖에 없는 거, 해결방법이 없죠. 마음이 아프고 너무 이해가 되기도 해요.
나쁜 것까지도 사랑인 것 같아요.
휘몰아치는 감정까지도, 알겠고, 모르겠는, 온갖 소란들까지도요.
어쨌든 지나가요. 다 지나가요. 스스로만 제외하고요.
제대로 아프고, 정면으로, 피하지 않고 앓고 나면
혼자인 듯 새로 피어날 거예요.
박: 부연하자면, 그런 말 많이 하잖아요. ‘다 지나가’. 당연히 지나가죠. 근데, 다 지나가는데 안 지나가는 건 나밖에 없더라고요. 그러니까 내가 새로 피어나도록 나를 돌봐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좋은 이별이 있냐, 없냐를 떠나서 이별 자체가 좋을 수는 없잖아요. 나쁜 놈, 죽일 놈, 이렇게 말하기도 하고. 근데 그런 것까지가 다 사랑이고, 그게 결과적으로는 나쁜 것 같지 않아요. 그런 끔찍한 기억이 있더라도 내가 나를 잘 지켜내면, 제대로 앓고 지나가면 좋게 작용하는 것 같아요.
'어떻게'와 '왜' 앞에서 사랑은 얼마나 작아지나요.
그저 이해할 수 없는 일 앞에서 믿을 수 있는 일만 믿기로 다짐하는 수밖에.
다정한 당신,
당신은 잘못이 없어요.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으니까요.
그저 '왜'와 '어떻게'에서 멀어져 보기로 합시다.
텍스트클러버가 가장 공감했던 이야기는 갑자기 친구를 잃어 '마음이 와장창 무너져버린' 사연이었습니다. 시인님의 엽서와 답변에 이어 2부에서도 비슷한 고민과 마음이 쏟아져 나왔어요. 소란스러운 마음의 크기와 정도는 모두 달랐지만, 누구든 한 번쯤 고민해봤던 일이기에 깊은 공감이 공간을 가득 채웠습니다.
박: '왜 그렇게 됐지?', '그래도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래?' 이런 게 연인이 아닌 친구 사이에서 많이 드는 생각이거든요. 근데 '그런 당위를 따져 물을 자격이 우리에게 있나?'라는 생각이 또 들더라고요. 내가 그 친구에 대해 모든 걸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연자처럼 모르는 게 많았고, 내가 섭섭한 게 있다면 그쪽은 더 섭섭한 게 있을 수 있으니까요.
다들 '왜', '어떻게'를 말하지 않고 끙끙 앓죠. 근데 너무 아파요. 저는 어떨 때는 연인보다 더 아픈 것 같아요. 왜냐면 친구는 떠나지 않는 내 편이잖아요. 근데 사라졌으니까. 문제가 어디서부터인지 잘 모르지만, 저는 이런 생각을 했거든요. 뱃속에 씨앗이 있는데, 이별을 발아시키는 씨앗인 거예요. 그게 싹이 터서 헤어진다는 상상까지 했었어요. '너도 나도 싹이 조금씩 자라게 했나 보다, 그래서 헤어지나 보다’ 그랬죠.
유: 사연자 분이 너무 상처 받지 않으셨으면 좋겠고,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 몰라요. 친구가 어떻게든 이겨내서 돌아왔을 때 제일 처음, 혹은 얼마 안 지나서 연락할 수 있는 안식처일 수도 있으니까, 그때를 위해서 마음을 단단히 잡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박: 제가 책점을 좋아하는데, 그냥 쫙 펴서 마음에 드는 어떤 구절을 찾아서 엽서를 썼어요. 말씀과 안 맞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저는 심란할 때 운세 풀이하듯이 하이쿠를 펼쳐요. 하이쿠에 의미심장한 구절이 많거든요. 그래서 하이쿠도 적어왔는데, 여러분의 7월 운입니다. (웃음)
유: 행사명을 <박연준의 점집>으로 할 걸 그랬네요. (웃음)
현장에서 나눠드린 하이쿠 몇 소절을 소개합니다.
볼만하구나 / 폭풍우 지난 후의 / 국화꽃.
>> 시인님의 운세 풀이: 힘든 시기를 겪지만 국화꽃처럼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것 같아요.
술을 마시면 / 더욱더 잠 못 드는 / 눈 내리는 밤.
>> 시인님의 운세 풀이: 7월에 술 많이 드시고 (웃음) 아름다운 밤이 많겠네요.
흰 양귀비는 / 날개를 떼어주는 / 나비의 유품.
>> 시인님의 운세 풀이: 7월에는 큰 희생을, 숭고한 희생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좋은 일을 하실 거 같아요.
질문자: 오래전 헤어졌던 애인과 다시 만나게 됐어요. 그동안 스스로 성숙해졌다고 생각해서 용기 냈는데, 막상 만나보니까 내가 아직도 어리더라고요. 성숙한 관계를 기대했는데, 종종 발견하는 어린 모습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박: 인간한테 완전한 성숙이 있을 수 있을까요? 제가 보기엔 질문 주신 분이 책임감도 있으시고 반성도 하시는 분인데, 그분도 부족한 부분이 있을 거예요. 성숙한 사람만 사랑을 해야 한다면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아요. 성숙한 인간이 몇이나 되겠어요. 계속 미성숙할 수밖에 없고요.
더 중요한 건, 이 사람이 부족한 점도 많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거, 싫지 않은 거. 그게 중요한 거 같아요. 그러니까 너무 자기의 미성숙을 탓하지 마시고, 서로 애틋해할 수 있으면 계속 만나면 될 거 같아요.
두 번째 텍스트클럽의 부제를 '텍스트 너머의 관계 이야기'로 정했어도 어색하지 않았을 만큼, 2부에서는 관계 안에서 느끼는 소란스러운 마음, 어리고 철없는 마음에 대해서 꽤 깊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산문집 <소란>의 어떤 에피소드와 비슷한 경험을 했거나, 자연스럽게 멀어졌던 친구와 다시금 가까워지는 경험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박: 모든 사랑은 쌍방적인 책임이라고 생각해요. 누군가 더 잘못할 수도 있겠지만, 오롯이 한 사람만의 잘못은 없잖아요.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는 다 각자 입장이 있는 거 같아요. 그걸 제가 되게 많이 깨달았어요. 제가 어렸을 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나'만 봤던 것, 나만 힘든 줄 알았던 것들을요.
남편과 연애 중간에 2년 정도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서 지금까지 시간을 쌓았는데요. 제가 그 2년 동안 굉장히 자랐어요. 성장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전의 저는 미숙하고 너무 어렸어요. '내가 이렇게 힘든데 너는 왜 나를 안 도와주니.', 이렇게 중심이 '나'여서 그랬거든요. 헤어지고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자라고, 여유가 생겼죠. 성장이라는 게 놀랄 정도로 똑똑해졌다는 게 아니라, 더 그 사람을 보는 거죠. 봐주는 거죠. 나만 보는 게 아니라.
그리운 것이 많은 사람은 슬픈 사람일까요, 기쁜 사람일까요?
잘은 모르지만 그득한 사람일지도 모르죠.
당신이 무언가를 충분히 사랑했기에 그리워하는 일도 많은 사람이기를.
지난 일은 다 긍정할 수 있는 단단한 힘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랄게요.
유: (2부 현장 질문에 이어) 신기해요. 누군가가 박연준 시인의 글을 읽고 삶에 영향을 받고 바뀌었잖아요.
박: 마음은 주고받는 것 같아요. 제가 꺼내놓으면 누군가가 반응하고, 여러분이 꺼내놓으면 제가 반응하는.
유: 오, 오늘 낭독회의 취지가 그건데. 정확했습니다. (웃음)
박: 저는 제가 주인공이 아니라 여러분이 주인공인 듯해서 좋았어요. 계속 사연을 듣고 얘기를 나눴잖아요. 되게 소통이 된 느낌, 뭔가 주고받는 듯한 느낌이에요.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차분하기도, 소란하기도 했던 두 번째 텍스트클럽. 박연준 시인님의 어렸을 적 추억이 담긴 장소라고 말씀해주셔서 저희도 더욱 뜻깊은 행사였습니다. 시인님의 소감처럼 텍스트클럽은 앞으로도 여러분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듣고, 더 깊게 나누며 텍스트 너머의 삶을 함께 만들어가려고 합니다.
다음 달 텍스트클럽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