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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 그리고 정원사

만약 정원 안에서 존재의 의미가 생기는 정원사가 미술관 안으로 들어간다면 어떻게 존재해야 하며, 어떤 연유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지난 봄과 여름, 두 계절은 그 질문에 답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간 자연에 일시적으로 개입하여 무언가를 조직하거나 돌봄이라는 형식하에 동식물을 보살핌과 동시에 배척하는 등의 일을 그 안에서 해왔다면, 미술관이라는 인공의 공간에서 나의 행위가 어떠한 의미를 형성할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 우선 대화의 주체가 달라질 수 있겠다. 과거를 자연과 대면하는 나 자신에게 한정된 시간이라 한다면 미술관에서는 타인과 대면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슨 말을 건네야 할까. 현재의 나로서는 현시대에 처해 있는 자연의 처지를 살피지 않는 행위들이 꽤 안일하고 태평해 보인다. 삶의 기본 요건을 의식주라고 살폈을 때, 의식주의 모든 바탕이 되는 자연이 부재한다면 우리의 삶을 지속시킬 수 있을까. 현대의 삶의 방식으로 우리의 세계는 유지가 될까. 영원을 갈망하는 일상의 태도 안에서 영원을 파괴하는 일상을 보내는 현대인의 삶의 모습을 정원에서 보냈던 시간을 기점으로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자연이 아닌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자연에서 현대로 들어감과 같다. 내게 자연 안에서 바라보는 현대는 제법 의아하고 이상한 모습이 많았다. 방식에는 태도가 깃들기 마련인데, 이는 자연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이기도 했다. 그중 죽음에 대한 현대인의 부정은 일상에 만연하게 스며있다. 이번 작업은 그에 대한 시야이다.


누군가가 떠올리는 정원을 살펴본다면, 대부분 갖은 꽃이 피어있고, 그 꽃 위로 날아드는 나비와 벌들, 그리고 바람은 살랑이고 햇빛은 따사로울 것이다. 가을이면 살이 두둑이 오른 여러 과일과 곡식들, 완연히 풍족하며 살아있는 것들이 가득한 풍경이 드리워질 것이다. 마치 그 상상조차 살아있는 듯이.



하지만 정원에서 보냈던 시간은 오히려 죽음을 인식하는 시간과도 같았다. 생명의 태어남과 사그라듦은 참으로 가까이 붙어서 자랐다. 나무가 죽음을 끌어안은 채로 몇백 년 동안 살아가는 것처럼, 늙어갈수록 병 하나씩 품은 채로 살아가는 것처럼, 살아 있음 뒤에는 쇠락함이 존재하였고, 자연 안에서 죽음은 삶과 공존하며 서로가 서로를 유지시켰다. 삶과 죽음은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만 동일한 규칙 중 하나였다.


이 정상적인 유한함을 인식하자 내가 딛고 있는 현대의 시스템을 살펴보게 되었다. 도시에서 태어난 내게 펼쳐진 세상의 표면은 단단하게 굳은 포장재였다. 그 아래에 흙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정원을 돌보고 난 이후였으며, 흙과 단절된 채 딛는 발걸음은 과거의 나에겐 정상의 기준이었다. 도시 자체가 죽음을 감추기 위해서 포장하고 외면한 우리의 삶 그대로를 보여주는 듯했다. 흙을 밟는다는 것은 죽음을 인식함과 같았다. 그렇게 흙이 죽음을 포용하는 세계라면, 우리의 발이 닿을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죽음은 점점 더 우리에게 단절되어져 갔다. 죽음을 거부하는 태도가 흙을 멀리하는 태도와 동일하게 인식되었다. 과거 대지의 표면은 흙을 바탕으로 수많은 생명을 키웠다. 흙은 누군가에게는 위험으로부터 피하는 안락한 집이었으며, 어느 한 생명에게는 흙 자체가 생명을 유지시키는 양식이었다. 흙의 포옹은 비단 삶뿐만이 아니라 죽음마저 안았음에, 누군가의 죽음은 누군가의 생명을 유지시켰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우리의 시스템은 이 순환의 맥을 덮은 채로 유지된다. 그렇게 죽음뿐만 아니라 생까지 같이 덮어 버린다. 포장된 대지 위에 떨어지는 낙엽들은 부여된 죽음을 취할 수 없이 영영 떠돌아다니거나 어디론가 버려져 자신의 부모와 다시 만날 수 없다. 대지가 닫혀있는 이상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생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피부를 닫아 놓은 대가이다. 그 파장은 사회 전역으로 퍼지고 결국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믿는다. 자연의 정상적인 순환이 끊긴 채 대지와 단절되어 살아가는 방식이 우리의 삶의 태도, 생각 등에도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묻는 바이다.


도시라는 공간에서 우리가 대지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 포장된 토대 위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대지를 잊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도시 안에서 흙은 어느 위치에 있으며, 어느 정도로 존중받고 있는가. 대지에 대한 권리는 그저 사람에 의한 소유의 권리만을 지칭하고 있다. 대지 그 자체에 대한 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지에 대한 통제는 대지 위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에 대한 통제를 뜻하기도 한다. 대지를 품으로 사는 생명에 대한 권리도 동일한 위치에 있다.


그저 보이는 그대로를 옮겨 놓고 싶었다. 이 작은 묘사가 하나의 시가 되어서 그동안 바라보지 못하던 시야를 트여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모습을 보고서 비록 한정된 공간이지만 우리의 상상은 무한하다면, 시를 보는 동안 숲의 표면 위로 풀과 나무들이 채워지고 숲과 멀어진 대지의 처지가 그려지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자연을 얼마나 이해하며 존중한 채로 살아가고 있는가.

영원함만이 온전할 것인가, 당신의 유한함 속에서 피어날 온전함을 기대한다.



‘우리 라코타 족 인디언은 대지를 사랑했으며, 대지 위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그 애착은 나이를 먹음에 따라 더 깊어지곤 했다. 늙은 사람들은 말 그대로 흙을 사랑했다. 그들은 땅 위에 앉거나 땅에 기대곤 했다. 어머니의 힘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는 느낌으로. 대지에 맨살이 닿는 것은 좋은 일이다. 늙은 라코타 족 사람들은 모카신을 벗고 맨발로 신성한 땅 위를 걷는 것을 좋아했다.

우리는 천막을 흙 위에 세웠으며, 제단 역시 흙으로 만들었다. 하늘을 나는 새들도 대지 위에 내려와 날개를 쉬듯이, 대지는 모든 산 것들의 최종적인 휴식처다. 흙은 부드럽고, 힘이 있으며, 정화의 힘과 치료의 힘을 갖고 있다.

늙은 인디언들은 의자에 앉기를 거부했다. 흙 위에 그대로 앉았다. 의자에 앉으면 생명을 주는 대지의 힘으로부터 그만큼 멀어지기 때문이다. 땅 위에 앉거나 눕는 일이 인디언에게는 더 깊이 생각하고, 더 깊이 느끼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삶의 신비를 더 자세히 볼 수 있었으며, 자기 주위의 다른 생명들에게 더 가까운 혈족임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류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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