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터러시 아카이브 #2
우리는 지금 기록된 언어의 시대에서
흘러가는 언어의 시대, 사유 이전의 반응의 시대로 이동하고 있다.
유튜브, 틱톡, 릴스, 쇼츠…
오늘의 콘텐츠는 3초 안에 시선을 붙잡지 못하면 사라진다.
언어는 축약되고 파편화되며,
소통은 감정과 속도의 논리에 지배된다.
그러나 인간은 반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유하는 존재다.
데카르트의 말처럼,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는 ‘생각할 시간’을 잃어간다.
언어를 잃는다는 것은 곧 생각의 기반을 잃는 것,
그리고 인간다움의 본질을 잃는 것이다.
언어학자 발터 옹(Walter J. Ong)은 문자문화의 탄생이 인류 문명의 도약을 가능하게 했다고 말한다.
문자는 기억을 외부에 저장하도록 하였고,
세대 간 지식의 축적을 가능하게 했으며,
철학·논리·과학·민주주의를 탄생시켰다.
그런데 지금, 다시 구술 중심의 문화로 회귀하고 있다.
영상과 음성 중심의 사회는 몰입과 공감의 힘은 강하지만,
사고의 깊이와 구조화된 인식 능력은 약화된다.
이 흐름이 계속된다면,
인간은 사고 대신 알고리즘의 추천에 의존하고,
지식은 소비재로 흘러가며,
감정과 자극은 사유를 대신하게 되고,
인류는 AI에게 사고를 위탁하는 종(種)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잃게 되는가?
바로 자기 자신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능력이다.
맥루한의 언설에 따라 미디어 형식이 내용보다 인간 사고에 미치는 영향이 다르기 때문에
영상미디어가 점점 문자미디어를 대체 또는 복합 사용되는 시대에
영상미디어와 문자미디어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영상 미디어 문자 미디어
감각·속도 중심 사유·구조 중심
즉각 반응 깊은 숙고
정보가 흘러간다 정보가 남는다
해석 불필요 행간·맥락 읽기
단선적 이해 구조적 사고
감정 중심 개념 중심
영상은 생각할 시간을 빼앗고,
문자는 생각할 시간을 만들어 준다.
읽기는 사유의 공간을 되찾는 행위이다.
미디어 이론가 마샬 맥루한( Marshall McLuhan)은
기술을 인간의 신체와 감각을 확장하는 ‘미디어’로 보았으며,
이를 ‘인간의 확장(Extension of Man)’이라고 정의했다.
즉 책은 눈의 확장, 바퀴는 발의 확장, 옷은 피부의 확장,
자동차는 발의 확장, 전기는 중추신경의 확장, 컴퓨터는 뇌의 확장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AI는 무엇의 확장일까.
인간 사고를 외부로 확장한 또 하나의 감각 기관, 혹은 사유의 신경망이라 할 수 있을까.
맥루한은 또다른 저서 <미디어는 메시지다(The medium is the message)>에서
“전달되는 내용보다 미디어 자체가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감각의 재배치는 인식의 변화를 낳고,
인식의 변화는 사고의 구조를 재구성한다.
더구나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 기기를 매개로 문자, 소리, 이미지, 영상 등
두 가지 이상의 감각과 매체가 결합된 복합매체(multimodal media) 시대를 살고 있다.
특히 ‘손안의 인터넷’이라 불리는 스마트폰은
이 다양한 감각의 확장을 통합하는 거대한 플랫폼이 되었다.
일상화된 디지털 기기와 AI 기술의 결합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 방식에 깊숙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영향은 긍정적 가능성만큼이나 윤리적 문제와 사회적 논쟁을 불러온다.
알고리즘은 개인의 취향과 신념을 강화시키며,
확증편향을 가속화한다.
이 과정에서 사고는 편향되고, 감정은 과열된다.
그 결과, 소셜미디어 속 극단적 진영 대립이나
1인 미디어의 선정적 콘텐츠가 빠르게 확산된다.
세계화된 미디어 속에서 사고와 행동은 오히려
폐쇄적 집단이기주의로 수렴하기도 한다.
이처럼 미디어의 발달이 인간의 감각과 사고를 재편하며,
우리 자신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변형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알고리즘은 사용자의 관심과 취향을 정교하게 분석하지만,
그 결과가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 으로 이어질 경우,
사고의 편향성이 심화되고, 나아가 행동의 극단화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정치적 영역에서 두드러진다.
극우·극좌적 이념 대립, 감정적 혐오의 확산,
집단 이기주의의 강화로 이어지며 사회적 균열을 심화시킨다.
또한 1인 미디어 시대를 상징하는 유튜브와 같은 플랫폼은
정보 생산의 민주화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선정적이고 편향된 콘텐츠가 빠른 속도로 확산되며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킨다.
이렇게 가상의 접촉이 실제의 신념으로 내면화되면서,
세상은 점점 더 분열되고,
공유해야 할 공동선(common good) 은 쉽게 무너진다.
결국 이것은 미디어의 특성에 의해 인간의 감각과 사고, 행동이
자신도 모르게 변형되어 가는 대표적 현상이다.
맥루한이 말한 “미디어가 곧 메시지(The medium is the message)”라는 명제가
지금 디지털 시대에 다시 현실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맥루한은 미디어의 진화가 시공간과 언어의 장벽을 초월한
‘새로운 대면의 시대(the new oral age)’ 를 가져올 것이라 전망했다.
그는 《미디어의 이해》에서, 전기적 매체가
인류를 문자 이전의 구술 공동체로 되돌려놓을 것이라고 보았다.
즉, 활자문화가 분절과 논리의 문화를 낳았다면,
전기적 미디어는 감각의 통합과 즉시적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하여
다시 ‘부족적(tribal)’ 공동체적 감각으로 회귀시킨다는 것이다.
그의 예언은 지금, 디지털 네트워크의 일상 속에서 실현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사회는 '비대면'이 일상이 된 세상을 경험했다.
화면 너머로 이어지는 ‘랜선 만남’은 처음엔 임시방편처럼 보였지만,
이제는 교육·업무·예술·마케팅 등 거의 모든 영역의 표준 방식이 되었다.
줌(Zoom) 회의와 온라인 수업과 화상회의,
라이브 커머스 실시간 영상 마케팅,
실시간 스트리밍 공연,
AI 아바타를 활용한 마케팅과 강연,
홀로그램 기술을 통한 가상 콘서트와 전시—
이 모든 것이 ‘대면하지 않고도 연결되는 사회’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더 이상 물리적으로 마주하지 않아도 얼굴을 ‘본다’.
기술은 이제 ‘비대면’을 넘어 ‘확장된 대면’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제 우리는 스마트폰을 열면 만날 수 있는 친구,
클릭 한 번으로 입장할 수 있는 회의실,
손끝으로 드나드는 시장과 공연장,
그리고 메타버스 속 집과 공원을 가진 시대를 살고 있다.
스마트폰을 켜면 곧바로 만날 수 있는 가상의 친구, 인공지능 비서, 온라인 공동체는
모두 이러한 ‘디지털 대면’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 연결은 진정한 '대면'일까?
우리는 서로를 보고 있지만, 눈을 맞추지 않아도 대화가 이루어진다.
감정은 이모티콘으로 표현되고, 공감은 ‘좋아요’로 환원된다.
기술은 물리적 거리를 좁혔지만,
정신적 거리는 오히려 멀어지고 있지는 않을까?
눈을 맞추지만 체온은 없다. 말을 주고받지만 숨결은 느껴지지 않는다.
관계는 즉각적으로 형성되지만, 망각 또한 빠르다.
맥루한이 말한 “미디어가 곧 메시지”라는 명제는
지금 이 시대에 더욱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네트워크가 확장될수록, 인간을 풍요롭게 하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감각의 왜곡과 단절을 낳기도 한다.
오늘의 네트워크 사회는 ‘연결’의 편리함 속에서, ‘관계’의 깊이를 잃어가고 있다.
인간 관계의 본질을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대면하지 않고도 대화하는’ 이 시대의 만남은
편리하지만, 감각이 절제된 만남이다.
AI가 중개하는 연결은 효율적이지만,
때로는 감정의 온기를 제거한 소통의 유사체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은 새로운 가능성도 함께 품고 있다.
AI 아바타로 언어 장벽을 넘어 실시간 번역 대화를 나누고,
시공간을 초월해 다른 문화권 사람들과 협업할 수 있다.
과거의 ‘대면’이 육체적 접촉을 기반으로 했다면,
이제의 ‘대면’은 감각의 확장과 인식의 재구성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공존을 실험하는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결국, 네트워크 시대의 ‘대면’은 단순히 서로 마주보는 행위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감각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의 문제다.
기술이 인간의 확장이 될지, 대체가 될지는 이 ‘감각의 복원력’에 달려 있다.
AI는 인간의 사고와 언어를 모방하지만,
읽기는 인간의 사유와 감정을 회복시키는 행위다.
기술이 빠르게 진화할수록 우리는 더 자주, 더 깊이 읽어야 한다.
AI가 대신 사고할 수는 있어도,
대신 느끼고 의미를 해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AI가 제공하는 정보가 방대할수록
인간에게는 판단력·해석력·질문력·창조력이 더 절실해진다.
AI는 정보를 ‘생성’할 수 있지만,
그 의미를 판단하고 재구성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는 인간이다.
OECD PISA(2022) 보고서에 따르면,
‘깊이 읽기’ 능력이 높은 국가일수록 디지털 문제 해결력도 높다고 한다.
즉, 읽기의 깊이는 단순한 언어 능력이 아니라
복잡한 세계를 이해하고 판단하는 인지적 힘과 직결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실은 그 반대다.
한국언론진흥재단(2023)의 조사에 따르면,
10대의 하루 영상 소비시간은 평균 105분,
텍스트 읽기 시간은 고작 7분에 불과하다.
영상은 감각을 자극하지만, 사유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영상 소비 시간이 늘어날수록 인간은 기억과 기록으로부터 멀어진다.
반면 읽기는 문장과 문장 사이의 침묵의 공간,
즉 ‘생각할 시간’을 선물한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교육 선진국에서도 우려되는 문제이다.
실리콘밸리의 창업자들은 자녀의 디지털 기기 사용을 제한하고,
대신 책 읽기를 권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술의 중심에 있는 그들조차
창의력의 근원이 '느리게 읽고 깊이 생각하는 시간'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읽기는 생각의 근육을 단련시키는 가장 오래된 인공지능 훈련이기 때문이다.
읽는 동안 인간은 멈추고, 생각하고, 질문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한다.
창조적 아이디어는 실험실보다
책상 위의 문장,
산책길의 사유,
타인과의 대화 속에서 더 자주 태어난다.
읽기는 인간의 사고를 정지시키지 않고
천천히 확장시키는 사유의 엔진이자 창조의 발화점이다.
오늘날 텍스트 중심의 깊이 읽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시대,
우리는 ‘읽는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
새로운 매체는 읽기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해야 할 대상이다.
기술은 인간의 확장이지만, 인간의 대체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AI와 디지털 미디어는 인간의 사고를 돕는 도구일 뿐,
그 도구를 주체적으로 다루는 힘은 결국 읽고, 사유하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지식 없는 행동은 맹목이고, 행동 없는 지식은 공허하다.”
(Immanuel Kant)
읽지 않는 사고는 공허하고, 사유 없는 지식은 껍데기와 같다.
읽기는 AI 시대의 사고 엔진이다.
읽는 동안 인간은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하는 동안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낸다.
AI가 제시하는 답보다 중요한 것은
그 답을 검증할 수 있는 ‘질문’이며,
그 질문은 언제나 ‘읽는 인간’에게서 비롯된다.
AI 시대일수록 우리는 다시 읽어야 한다.
그것이 기술의 주인이자, 문명의 창조자로 남는 길이다.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예측하고 재조합하는 기술이다.
그러나 AI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AI가 생성할 수 있는 세계의 깊이는 인간이 읽고 사유해온 깊이를 절대 넘어설 수 없다.
AI 시대의 본질적 질문은 ‘AI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AI를 활용한 글쓰기를 통해 ‘읽기’를 다시 말하려 한다.
내가 초안을 쓰면 AI가 다듬고, 그 위에 내가 다시 생각을 더한다.
그렇게 인간의 사유와 기계의 편집이 교차하며 하나의 글이 완성된다.
그것은 단순한 협업이 아니라, 읽기와 쓰기의 새로운 공존의 형식이다.
인간이 읽고, 판단하고, 의미를 구성하는 과정은
곧 읽기–사유–표현–창조로 이어지는 순환의 고리다.
이 순환이 바로 인간만이 지닌 지적 생명력이다.
AI는 인간을 대체하는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와 표현을 확장하는 동반자가 될 수 있다.
읽는 인간’은 정보를 단순히 소비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언어 속에서 세계를 해석하고,
타인의 경험을 자기 경험으로 변환하며,
사유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한다.
읽는 인간은 기억하는 존재이자,
의미를 엮어 세계를 다시 써 내려가는 존재다.
AI와 함께 읽고, AI와 함께 사유하고, AI와 함께 창조하는 시대.
그럼에도 세상을 의미있게 이해하고 다시 써 내려갈 수 있는 존재는
여전히 ‘읽는 인간’ 뿐이다.
인간의 언어로 다시 세상을 쓰기 위해,
나는 오늘 다시 ‘읽기’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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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 예고 — 리터러시 아카이브 ③
우리는 왜 읽고, 왜 반드시 표현해야 할까?
AI는 대신 말해주지만, AI가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AI 시대, 읽는 인간으로 살아가기 — 그리고 왜 우리는 표현해야 하는가"
사유와 표현 사이에 서 있는 인간의 길을 탐색해봅니다.
해성 김수경(海星 金水卿)/리터러시아 수경(literasia Sookyoung, Kim)
해성(海星)은 마리스텔라(maiesrella)라는 가톨릭본명을 한자로 쓴 것으로,
마리스텔라가 바다의 별이라는 의미처럼 별처럼 사람들에게 길을 비추는 존재를 지향하고자 한다.
‘리터러시아(Literasia)는 Literacy 와 Asia 의 결합어로, 지식의 민주화와 배움의 권리를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