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와의 조용한 대화
문자를 해득했다는 전제 위에서,
나는 읽기를 ‘듣기’라고 생각한다.
읽는다는 것은 눈으로 문자를 따라가는 일이지만,
그 본질은 저자의 말을 듣는 데 더 가깝다.
이때 화자는 저자이고,
청자는 독자다.
그래서 읽기는 결국
저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이다.
읽기•이해•표현 융합리터러시에서
읽기의 출발은 반복 읽기다.
그리고 그 반복은 다시 듣기에서 시작된다.
처음 읽을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문장,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
그때는 그냥 지나쳤지만
나중에 다시 붙들리게 되는 표현들이 있다.
반복 읽기는 그런 부분 앞에 다시 머무는 일이다.
그것은 단순히 같은 글을 여러 번 보는 일이 아니다.
내가 놓친 것을 돌아보고,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가려 보고,
무엇을 더 알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묻는 과정이다.
그래서 반복 읽기에는
자연스럽게 사고의 움직임이 따라온다.
이해한 것과 이해하지 못한 것을 구분하고,
이해되지 않는 것을 다른 텍스트와 경험 속에서 다시 비추어 보는 일.
그런 점에서 반복 읽기는 메타인지의 작동이기도 하다.
읽기는 언어 영역의 가장 기초이면서도
가장 깊은 곳까지 이어지는 행위다.
잘 듣지 못하면 깊이 읽을 수 없고,
깊이 읽지 못하면 끝내 자기 생각에 도달하기 어렵다.
그래서 읽기는 중요하다.
읽기는 단지 정보를 얻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생각이 내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일이고,
그 생각과 만나 내 안의 언어를 다시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최근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를 읽으며
그의 방대한 독서와 사유의 힘에 새삼 감탄하게 되었다.
제목과 도입, 글의 전개,
관련 주제에 관한 다른 작가들의 저작을 자연스럽게 불러오는 방식,
그리고 그것을 자기 해석 안에서 조화롭게 엮어 가는 힘까지.
그의 글은 잘 설계되어 구축된 하나의 건축물 같기도 하고,
구도와 색감, 영감이 균형 있게 버무려진 한 편의 구상화 같기도 했다.
좋은 글을 읽을 때면
한 사람이 얼마나 오래 읽고, 생각하고, 자기 언어로 가다듬어 왔는지가
문장 사이에서 조용히 느껴진다.
읽는다는 것은 그렇게
보이는 문장 너머의 시간과 사유를 함께 듣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요즘
‘삶을 읽는 연습’을 준비하며
읽기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독서는 비록 간접적인 대화이지만
분명 저자와의 대화다.
말 대신 문장이 있고,
목소리 대신 문체가 있으며,
질문과 응답 사이에는 시간차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읽기는 여행과도 닮아 있다.
둘 다 자신이 시간과 공간을 선택해 들어간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여행과 다른 점도 있다.
텍스트 속에서는 시공간을 훨씬 더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
한 문장 앞에서 오래 멈출 수도 있고,
몇 장을 건너뛰었다가 다시 돌아올 수도 있으며,
한 권의 책에서 시작해 전혀 다른 텍스트로 길을 넓혀 갈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실제 여행보다
이중적인 '책 여행'을 더 좋아한다.
텍스트가 주는 안정감은
사이버 공간의 빠른 흐름과는 다른 결을 지닌다.
그 안에는 머묾이 있고,
침묵이 있고,
조용히 생각을 키우는 시간이 있다.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글자를 해독하는 일이 아니다.
누군가의 생각을 듣고,
그 안에서 내 생각을 다시 만들어 가는 일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조용히 한 권의 책을 펼치며
귀를 기울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