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서점에서

종이신문처럼 펼쳐진 오늘의 흐름

by 해성 김수경

오랜만에 서점에 갔다.

장소 협찬을 부탁드리기 위해 대표님을 만나러 간 길이었다.


대표님이 잠시 자리를 비우신 사이, 나는 천천히 서점 안을 걸었다.

새 책들은 주제별로, 장르별로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베스트셀러 코너와 한강 작가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라이트 노블과 웹툰도 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 권 한 권은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많은 책들이 한데 모여 이루는 풍경은 묘하게 하나의 흐름처럼 느껴졌다.


지금 사람들이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어디에 마음을 두는지,

서점은 말없이 펼쳐 보이고 있었다.



요즘 나는 책을 서점에서 오래 고르지 않는다.

필요한 책은 도서관에서 빌리거나 온라인 서점에서 검색해 본다.

꼭 필요한 책이 아니면 선뜻 사지 않게 된 지도 꽤 되었다.


온라인에서는 내가 찾는 것만 보게 된다.

관심 있는 기사만 읽고 필요한 정보만 골라 보다 보면,

세상의 흐름을 넓게 펼쳐 보는 감각은 점점 무뎌진다.


그런 점에서 서점은 종이신문을 닮아 있었다.


종이신문에는 기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큼직한 제목도 있고, 작은 단신도 있고, 뜻밖에 눈길을 붙드는 광고도 있다.

내가 보려던 것 너머의 것들까지 함께 시야에 들어오고,

그러다 보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세계가 슬며시 들어온다.


그날의 서점도 꼭 그랬다.

지금의 지식 트렌드와 시대의 요구가 한곳에 펼쳐져 있었고,

나는 그 앞을 지나며 한 시대의 표정을 천천히 읽고 있었다.



문득 예전 생각도 났다.


한때 서점은 극장 가듯 혼자서도 가는 곳이었다.

특별한 목적이 없어도 들어가 한참 머물 수 있었고,

누군가를 만나기 전 책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때로는 서점 자체가 약속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서점에 간다는 말은 책을 사러 간다는 뜻만이 아니라,

한 시절의 시간을 보내러 간다는 뜻이기도 했던 것 같다.



더 오래 머문 곳은 고전 코너였다.


어릴 적 읽었던 책들,

익히 제목을 알고 있는 책들,

교과서에서 한 번쯤 만났던 책들이

새 표지와 판형을 입고 다시 놓여 있었다.


이미 아는 책인데도 처음 보는 것처럼 눈길이 갔다.

낯익은데도 새롭고,

오래된 기억이 지금의 시간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그중에는 몇 해 전 일본의 한 서점에서 보았던 책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도 있었다.

손안에 들어오는 크기에 단색 천으로 말끔하고도 고급스럽게 단장된 책들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스마트폰 안의 정보는 빠르게 소비되고 금세 다른 정보에 밀려나지만,

책은 그러지 않았다.


손에 쥐고 싶고,

곁에 두고 싶고,

오래 소장하고 싶은 물건처럼 보였다.


정보가 아니라 물건,

소비가 아니라 머묾에 가까운 무엇.


그 작은 책들은 그런 감각을 조용히 일깨워 주었다.




그래서인지 책들 사이를 걷는 내내

설렘과 안정감이 함께 밀려왔다.


새로운 세계에 잠시 여행 온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곳으로

돌아온 듯한 마음이 들었다.

낯섬과 익숙함이 함께 머무는 그 안정감이

이 공간을 새롭게 느끼게 했다.


아, 나는 이런 감각을 잊고 있었구나 싶었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서점에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올해는 그럴 일이 더 많아질 듯하다.


작년에 ‘길 위의 인문학’을 했던 이곳에서,

올해는 ‘지혜학교’를 해 보고 싶다.

AI 시대 성인 리터러시를 주제로 한 강의도 구상하고 있다.


그렇게 된다면 이곳은

내게 더 자주 오가는 장소가 될 것이다.




이 서점에는 ‘책거실’이라는 이름의 공간이 있다.

커피 한잔을 곁에 두고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자리다.


책과 거실,

읽는 일과 머무는 일이

한 단어 안에서 만나는 느낌이 좋았다.


서점 한쪽에 붙은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독서러들의 아지트’.

책거실에서 하는 젊은 친구들의 독서모임이라고 했다.


대표님은 왁자지껄 책 읽고 토론하며

웃는 소리가 들릴 때가 참 좋다고 하셨다.
책을 사이에 두고 사람들이 모이고,

이야기가 오가는 풍경이 서점에 생기를 더하는 듯했다.


요즘 말하는 ‘텍스트 힙’도 어쩌면 이런 데서 시작되는 것 아닐까.
책을 읽는 일이 혼자만의 취향에 머물지 않고,

사람과 공간을 잇는 문화가 되는 것.
그 흐름이 반갑게 느껴졌다.




대표님과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곳은 2대째 이어져 온 지역 서점이다.

대표님은 자신이 서점을 이어받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내심 얼마나 기뻐하셨을지 이제야 짐작이 간다고 했다.


대표님에게도 외동딸이 있지만,

딸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따로 있어

서점을 이어받을 생각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직원들을 믿고,

할 수 있는 만큼 오래 서점을 지켜가고 싶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서점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책이 진열된 공간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시간과 마음이 오래 쌓여 만들어진 장소처럼 느껴졌다.


올해 지혜학교 공모가 잘되어

이곳을 좀 더 자주 드나들 수 있으면 좋겠다.



책들 사이를 천천히 걷고,

생각이 멈출 때는 책거실 한쪽에 앉아 쉬어 가는 일.

그렇게 이곳이,

내가 가끔 돌아와 머물 수 있는

작은 방 하나쯤 되어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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