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성주간을 지내며
요즘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를 보며,
나는 영웅주의의 위험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하는 사람.
자국의 이익을 세계의 기준으로 삼는 사람.
국민을 대표하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어느새 국민 위에 서려는 사람.
그는 자국민 보호와 국익을 말하지만,
그 언어의 밑바닥에는 다른 나라의 주권조차
자국의 편익에 종속시켜도 된다는
오만이 스며 있다.
오랫동안 자신이 해 오던 사업 방식으로 나라를 경영하려 하고,
세계 질서를 미국의 이해에 맞게 움직이려 한다.
그 모습은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이라기보다,
제국의 통치자를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인지 시위대의 “No King”이라는 구호가 오래 남는다.
또한 최근 미 법원은
백악관 호화 연회장 신축을 둘러싼 소송에서
“미국 대통령은 미래 세대를 위해 백악관을 관리하는 수탁자일 뿐,
소유자가 아니다.”라고 판시하였다.
그 당연한 사실을
사람들은 거리에서, 법정에서
외쳐야 했다.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도 낯선 장면은 아니다.
2025년 12월 3일 계엄령이 내려졌을 때,
우리는 비슷한 장면을 목격했다.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권력 앞에서,
사람들은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헌법 제1조의 정신을
몸으로 다시 세워 올렸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 문장은
청와대나 백악관 안에서 완성되는 문장이 아니라,
위기의 순간
거리에서, 국민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증명되는 선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성주간을 맞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다 보면,
그 시대 사람들도 메시아를 기다렸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억압을 끝내고,
세상을 뒤집고,
고통을 단번에 멈추게 할 존재.
눈에 보이는 힘으로 세상을 바꿔 줄 영웅.
아마 많은 이들은
그런 메시아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방식으로 오지 않으셨다.
그분은 낮은 곳으로 가셨고,
약한 이들의 소리에 응답하셨다.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버려진 이들 곁에 머무르셨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대처럼
세상을 단번에 바꾸지는 않으셨다.
누군가 위에 서서 군림하는 힘으로
구원을 보여 주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분은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다.
어린양처럼 자신을 내어주셨다.
힘으로 증명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으로 끝까지 견디는 존재로
남으셨다.
그래서 나는 자꾸 생각하게 된다.
정말 영웅 한 사람이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마법이 아니고서야,
누군가 홀로 세상을 구원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내 삶 또한 그렇다.
내 삶을 대신 살아 줄 영웅도,
나를 대신 구원해 줄 구세주도 없다.
내가 스스로 깨어 있지 않다면,
결국 바깥에서 영웅을 자처하는 사람에게 기대게 된다.
그리고 그런 기대는 종종
거짓 선동과 위험한 매혹으로 이어진다.
인간이 신격화될 때
잘못된 영웅심리는
조용힌 우리 안으로 수며들어
우리를 병들게 한다.
영웅을 기다리는 마음은
어느 순간,
나를 잃고
눈앞의 이익에
쉽게 복종하는 마음이 되기도 한다.
영웅주의는 늘 화려하고 강한 얼굴로 우리를 유혹한다.
그러나 세상을 버티게 하는 힘은
대개 조용하고 낮은 곳에 있다.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나는 다시 묻는다.
세상을 구하는 것은
권력인가, 사랑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