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들과 함께 본 영화
《어른 김장하》

— 베리어프리 버전으로, 경남점자정보도서관에서

by 해성 김수경

1. 여러 사람의 기억으로 만난 김장하라는 이름

경남점자정보도서관에서 영화 《어른 김장하》를 보았다.

그것도 화면 해설이 더해진 베리어프리 버전이었다.


이 영화는 전 경남도민일보 김주완 기자가

미담을 찾아 나선 길에서 만나게 된 김장하 선생과,

그 주변 사람들의 인터뷰로 이루어져 있다.


한 사람의 삶을 직접 드러내기보다,

그가 남긴 흔적을 여러 사람의 기억을 통해

더듬어 가는 방식의 다큐멘터리였다.


2. 돈이 아니라 삶을 나눈 사람

김장하 선생은 평생 남성당 한약방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약을 지으며 살아왔다.


이렇게 번 돈을 함부로 쓸 수 없어,

그는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눔을 실천하였다.


그가 번 돈은 자연스럽게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돈만 건네지 않았다고 한다.

편지를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나중에 자신에게 갚지 말고

사회에 갚으라고 말했다.


그 장학생 가운데 한 사람이

문형배 헌법재판관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전하는 감동은

특정 인물 때문이 아니라,

이름 없이 이어진 수많은 삶의 변화 때문이었다.


3. “공평과 애정”을 살아낸 사람

형평운동의 선언문에 담긴 말,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이다.”


김장하 선생은 이 문장을

외친 사람이 아니라, 살아낸 사람처럼 보였다.


강상호 선생의 묘에 조용히 비석을 세우고,

지역의 소리를 찾으라고 진주신문을 후원하고,

가정폭력쉼터를 지원하고,

‘명덕신민’의 뜻을 품은 명신고등학교를 세워

국가에 헌납한 이야기까지.


전교조 교사들을 한 명도 해직시키지 않았다는 대목에서는

한 사람의 양심이 제도보다 더 크게 작동할 수 있음을 보았다.


그의 삶은 늘

드러나지 않는 자리에서 이어졌다.


4. 돈 대신 건넨 말 한마디

그의 지갑은 어려운 사람들을 향해 열려 있었지만,

모든 요청에 돈으로 답하지는 않았다.


한 청년 셰프가 돈을 빌리러 갔을 때,

그는 돈 대신 말을 건넸다고 한다.


그 말 한마디가 그 청년에게는

더 큰 용기가 되었고,

훗날 식당을 열어 사람들을 대접하는 삶으로 이어졌다.


그 셰프는 말했다.


경제적 격차는 교육의 격차로 이어지고,

결국 일상의 경험의 격차—

심지어 음식과 미각의 경험까지—로 확장된다고.


그 말이 오래 남았다.


5. 성실함으로 이어진 삶

김장하 선생은 본인을 위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쓰지 않는 분처럼 보였다.


차도 없이,

낡은 체크무늬 셔츠와 오래된 양복을 입고,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늘 아침에 문을 열고

저녁에 문을 닫는 삶.


성실함이라는 말이 너무 흔해서

오히려 다 담지 못하는 삶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60여 년을 이어 온 남성당 한약방이 문을 닫는 날

많은 사람들이 꽃다발을 들고 찾아온다.


그 장면을 보며 누군가는 말했다.

어쩌면 그날은

60년 감옥 같았던 한약방에서

해방되는 날이었는지도 모른다고.


6. ‘본다’는 것의 다른 방식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한 사람의 삶이 이렇게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무주상보시를

온몸으로 실천한 사람.

가장 낮은 곳의 사람들을 말없이 돌본 사람.


이분은 어쩌면

종교의 언어를 쓰지 않았을 뿐,

삶으로 사랑을 증언한 사람 아니었을까.


그리고 동시에,

이 영화를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보고 있는가를

계속 의식하게 되었다.


나는 그날,

시각장애인들과 같은 공간에서

이 영화를 보고 있었다.


같은 장면을 듣고,

같은 순간에 웃고,

같은 대목에서 조용해지는 경험.


영화를 ‘본다’는 것이

이렇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으로 실감했다.


7. 함께 보고 싶은 마음

상영이 끝난 뒤 소감을 나누는 시간이 이어졌다.


“진짜 부자는 마음이 부자인 사람이다.”

“겸손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적 지주 같은 분이었다.”

“힘이 되었다.”


동시에 베리어프리 버전에 대한 의견도 나왔다.


장면 전환에 대한 안내가 더 필요하다는 점,

풍경 설명이 부족하다는 점,

인터뷰 대상에 대한 설명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의견들은

단순한 불만이 아니라

함께 보고 싶다는 의지처럼 들렸다.


8. 접근성은 한 사람의 말에서 시작된다

나는 난생처음 화면 해설 영화를 접했다.

어떤 순간에는 일부러 눈을 감고 들어보기도 했다.


보지 못한다면 결국

듣는 일에 더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화라는 매체는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시각에 기대고 있다.


그 모든 것을 말로 풀어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문득 한 장면이 떠올랐다.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에서

‘책 읽어주세요’ 캠페인을 할 때였다.

다섯 살 아이를 둔 시각장애인 아버지가 말했다.

그림책에 그림 해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 한 마디에서

출판사와 도서관이 움직였고,

실제로 그림책 해설 오디오북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접근성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이렇게 한 사람의 구체적인 요구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9. 한 공간의 의미

경남점자정보도서관에서의 상영 역시

그런 의미로 다가왔다.


시각장애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영화를 함께 보는 경험.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중요한 사건처럼 느껴졌다.


이 공간은 나에게도 낯설지 않다.

그래서 더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도와 시의 지원을 받고 운영되고 있지만,

공간은 여전히 부족하고 기능은 나뉘어 있다.


점자정보도서관은 단순히 자료를 만드는 곳이 아니라,

경남에서 시각장애인들이

교육과 문화를 이어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다.


그래서 수년 전

관장님이 사비를 들여 교육관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점자정보도서관은 단지 점자책과 녹음도서를 만드는 곳이 아니라,

시각을 잃은 이들이 다시

사회로 나가는 첫 관문이자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던 시각장애인들을

세상 밖으로 이끌어 내는 교두보이기 떄문에다.


도서관과 교육 공간이 분리된 현실은

이용자 입장에서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닐 것이다.


10. 우리가 함께 답해야 할 질문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어디까지 공공의 책임으로 바라봐야 할까.


단순한 복지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누구나 교육과 문화, 정보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면

이 질문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자꾸 한 가지 질문이 남았다.


만약 김장하 선생이

이 현실을 보셨더라면

과연 어떻게 하셨을까.


아마 또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가장 필요한 곳으로 마음을 보내지 않으셨을까.


그리고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가능한 실천적인 방식으로

마음을 보태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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