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이 - 둘째 날
어제처럼 뜨거운 날이었다. 아침부터 꾸준히 데워져 오후에는 최고 32℃ 까지 올랐다. 이렇게 더운 날에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태양볕에 노출되면 물에 젖은 종이인형처럼 금세 지치고 만다. 오늘 찾아갈 마라도는 절정의 무더위를 피해 첫 배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우리는 송악산 근처에 있는 산이수동항에서 마라도로 들어가는 배편을 선택했다. 9시 20분에 출발하고, 11시 30분에 마라도를 떠나 돌아오는 배편을 이용했다. 배를 타고 들어갈 때 걸리는 시간 (약 30분)을 제외하면 마라도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1시간 40분 정도이다. 들어갈 때 파도가 심해 배가 많이 흔들린 탓인지, 약한 멀미를 했다. 멀미가 걱정이라면 선실 뒤편에 앉을 것을 추천한다.
마라도는 작은 섬이라서 1시간 40분이면 충분히 섬 전체를 둘러볼 수 있었다. 대한민국 최남단 섬이라는 상징성 탓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유명한 섬이지만, 막상 가보니 생각보다 작아서 놀랐다. 마라도에 내리면 북쪽으로 제주도와 한라산이 생각보다 가까워 보여서 또 놀랬다. 넓게 펼쳐진 초원 같은 공간은 대관령 양 떼 목장에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늘을 드리워줄 큰 나무도 딱히 없는 초원은 선선한 바람이 부는 봄, 가을이 가장 방문하기 좋겠다고 생각했다. 민가 근처에 자리 잡기를 좋아하는 제비와 참새도 많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놀란 것은 생각보다 많은 중식당과 카페였다. 약 15년 전 아내가 제주도에 살 때 마라도를 찾은 적이 있는데, 그때는 자장면집이 두 곳뿐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톳해물자장면과 톳해물짬뽕이 유명해져, 마라도에 들리면 꼭 먹어야 하는 필수코스처럼 되어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자연스럽게 생겨난 식당이겠지만, 늘어나는 가게만큼 쓰레기도 늘지 않을까 걱정됐다. 사장님들께는 죄송한 마음이지만, 마라도에 이렇게 많은 중식당과 카페가 필요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마라도는 늘어난 방문객과 식당들을 충분히 품을 수 있을까? 그런 우리를 마라도는 지금도 반기고 있을까?
그러다 문득 '나의 인생도 정말 필요한 것들로만 채
우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섬에 몰려든 중식당처럼, 필요 이상의 것들이 내 삶에 묶은 때처럼 군데군데 껴있는 건 아닐까? 당장은 두둑한 뱃살이 과한 섭식의 증거로 분명하게 자리하고 있다. 사놓고 거의 안 쓴 물건과 읽지 않을 책들, 입지 않은 옷들. 꾸준히 돈 만 빠려 나가고 있는 OTT 구독 서비스들. 불필요하고나 과하게 붙들고 있는 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매년 새해가 되면 여지없이 세우는 다이어트 계획처럼, 생활 다이어트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끝내 마라도 필수 코스 톳해물짜장면과 톳해물짬뽕은 먹지 못했다. 선 듯 발길이 가지 않았다. 가치의 우선순위는 사람마다 다르다.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마라도에서 먹은 해물자장면과 해물짬뽕의 추억을 어찌 가볍게 여길 수 있겠는가. 단지 우리는 마라도의 추억으로 그때 먹은 해물짬뽕보다는 '가벼운 삶'을 떠올리기로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