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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주 Jul 26. 2022

뿌리내리기

제주살이, 첫날

제주도는 예전에 출장차 두어번 온적 있지만, 제주만의 특색을 느끼지 못한 채 돌아갔다. 제주 공항 근처의 유명 호텔이나 중문의 제주 국제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행사였다. 저녁으로 흑돼지 오겹살과 한라산 소주가 주제도 특별 일정의 전부였다. 사실 육지에서도 얼마든지 흑돼지 삼겹살을 찾을 수 있는데도 말이다.


이번엔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한 '한경면'라는 작은 동네에서 지내게 되었다. 위로는 한림읍, 아래로는 서귀포시 대정읍, 동쪽으로 안덕면과 맞닿아 있는데, 전체 인구가 1만 명이 안 되는 한적하고 조용한 곳이다. 육지에서 제주를 들어오는 관문인 제주시나 성산 같이 많이 알려진 광관지도 아니고 한라산과 접해있지도 않는 지역으로, 주민들은 주로 농업과 어업에 종사한다고 한다.


제주도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한경면


우리가 묵을 집은 창밖으로 바다가 보이지는 않지만 가까운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한경면 해상 풍력발전소와 싱게물 쉼터가 매력적인 곳이다. 지는 해를 보기에는 카페도 좋지만, 바다 앞쪽까지 나갈 수 있는 해상공원도 좋다. 연인끼리 물놀이를 즐기고 싶다면, 판포 포구에서 스노클링이나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 주의할 점은 물때를 맞춰가야 한다는 점. 배로 10분 거리의 도내 가장 큰 무인도인 차귀도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물이 발견된 고산리 선사유적지도 있다. 산간도로로 이어진 안쪽으로도 매력적인 식당과 카페도 많다. 곳곳에 덜 알려진 매력적인 카페, 미술관과 서점 등이 보석처럼 숨어있어, 보물찾기 하듯 찾아 나서는 재미가 있다. 해 질 무렵 노을이 물든 바다와 보면 아름다운 곳. 한경면은 힐링하기 좋은 곳이었다.


한경면에서의 첫날 아침은 운동 겸 새벽 산책으로 시작한다. 새벽 5시 반쯤 집을 나서는데, 제비와 참새는 이미 시장이라도 열린 양 시끄럽게 지저귄다. 신창 풍차 해안을 따라 걷는 새벽 산책은 한적해서 좋았다. 도로가로 올라와 있던 게들이 재바르게 피해 숨느라 정신없다. 멀리까지 시원하게 열린 바다와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은 상쾌하다. 짙고 푸른 제주 바다는 간간이 구름 품은 맑고 푸른 하늘과 선명한 경계를 그린다. 그 사이로 나란히 늘어선 거대한 풍차는 천천히 날개를 돌린다. 가다 보니 하얀 백로들이 모여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첫날 아침부터 작은 소동이 있었지만, 이런 길이라면 매일 산책 나설 맛이 난다고 생각했다.


아침 산책 길에 만난 백로들


산책을 마치고 쉬었다가, 근처 브런치 가페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제주도의 가게들은 문을 느지막이 열고 일찍 닫는다. 쉬는 날도 각자 다르니 찾아가기 전에 미리 확인해 보는 게 좋다는 걸 배웠다. 오후에 만난 제주 하늘이 투명한 파란 바다와 함께 시원했다면, 해 질 녘 저녁의 하늘은 깊고 진했다.


제주도는 곳곳에 일제 시절의 군사 시설이나 제주 4.3 사건의 흔적들이 흉터처럼 남아있는 곳이다. 그래서 우리 사는 인생 닮았다. 정호승 시인의 시처럼, 그늘을 사랑할 수 있어야 나뭇잎 사이 반짝이는 햇살의 아름다음을 알고, 눈물을 흘려본 사람이 함께 눈물 흘리며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다. 제주도는 그런 사람 같다. 속으로 큰 상처를 안고 있으면서도, 속상한 마음 안고 찾아오는 이들을 따뜻한 미소로 맞아주는 그런 사람 말이다. 그리곤 곁에 앉아 가만히 지는 해를 함께 봐주는 그런 사람을 닮은 것 같다.


오후의 제주 하늘과 저녁의 제주 하늘은 같으면서도 달랐다.


한경면에서 첫 날을 보내며 앞으로 할 달 살 뿌리를 내본다. 아직은 첫날이라 어색하지만, 자주 마주치다 보면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그 모습에 익숙해지며 친해지는 거다. 내일 더 친해질 반가운 제주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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