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이: 0일 차
인천에서 제주까지 먼 길을 나선건 6월 29일 정오쯤이었다. 광주에 있는 처갓집에 하루 묵고, 완도 여객터미널에서 배편으로 제주를 들어가는 길을 택했다. 차를 가져가야 했기 때문에 배편만 생각했다. 배편으로 제주로 들어가는 지역은 생각보다 많다. 인천, 목포, 완도, 고흥, 여수, 삼천포, 부산. 그 가운데 최단거리인 완도-제주를 택했다. 오후 3시 '블루펄'호를 타고 완도를 출발해 5시 40분쯤 도착하는 경로였다.
작은 체구임에도 '운동신경은 있는 편'이라며 부심을 가지며 살았다. 중/고등학교 시절, 키는 반에서 열 손가락에 들 정도로 작았지만, 체육 시간에는 중간 키쯤 되는 친구들과 비교될 정도의 실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특히 단거리 달리기는 반에는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빠른 편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보기보다' 운동신경이 있는 편, 아니 '평범한 정도'가 옳다. 그럼에도 매번, 운동 신경 있는 편이라고 굳이 강조하곤 했다. 자연스레 체력도 자신하곤 했다. 자랑스러운 육군 병장 만기 전역으로 '신체 건장함'을 확인받았다.
그러던 내 부심이 처참히 부서진 날이 있다. 아내와 몇 년 전 한 여름의 도쿄를 여행했을 때였다. 그해는 유난히 더웠던 해이고, 하필 절정의 무더위 시기에 일본을 찾았다. 낮 최고 기온이 43℃에 달해 어린이와 노약자에게 외출을 삼가라는 방송이 나오곤 했다. 오전 10시를 지나면 벌써 35℃를 넘어 있었고, 더위보다 힘든 높은 습도 역시 문제였다. 일찍이 경험한 적 없는 충격의 온/습도에 나는 빠르게 지쳐갔다. 마치 물에 젖은 종이인형처럼 온몸이 땀에 젖어 무겁고 지쳐있었다. 이 날은 나의 저질 체력에 스스로에게도 충격이었다.
불구덩이 일본을 다녀온 지 약 4년, 지금은 그 시절보다 더 처참한 체력을 보장한다! 마지막일지 모르는 한 여름의 제주 생활을 두고, 아내는 벌써부터 온난 다습한 날씨에 나를 걱정하고 있다. 금세 지칠 거라고. 그러나, 나름의 투지를 불태워 본다. 새로운 일상의 설렘이 습한 날씨의 염려를 앞서고 있음이 분명하다.
제주에 도착하고도 선내에서 차들이 완전히 빠져나가기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예정대로 5시 40분경 제주항에 정박했지만, 우리는 6시 20분이 지나서야 제주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제주 날씨는 여전히 뜨거웠지만 공기가 유난히 깨끗해서 멀리 수평선 경계가 선명하고 또렷했다. 해안도로를 따라 운전하는 내내 한쪽은 한라산이, 반대쪽은 넓은 들판과 바다가 건너보였다. 산이 많은 지역에서 주로 살아온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신비로운 정경이었다.
한 달간 머무를 집은 제주도 서쪽에 위치한 한경면 신창리에 있었다. 제주항에서 숙소까지 차로 1시간 20분 정도 달려왔다. 7시가 넘어가면서 해는 서쪽하늘에 낮게 걸리었지만, 날씨는 여전히 더웠다. 숙소에 들어선 시간은 해는 서쪽하늘 끝에 걸린 7시를 40분쯤. 짐을 들이고 정리하고 늦은 저녁을 마친 후에야 겨우 짧은 일기를 써 내려가는 시간을 얻었다. 새로운 이곳에서의 맞이하는 첫날의 하루는 새 날의 시작으로 준비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