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차 미국 생활기, 첫 이야기.
보고 싶은 친구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20년 새해를 맞아 저희 부부는 오랫동안 마음먹고 있던 프로젝트를 하려 합니다. “미국을 알아가는 시간”이라는 모토로 팟캐스트를 시작합니다. 팟캐스트 이름은 ‘아메리카노2020’으로 지어봤어요.
2020년 1월 3일. 친구, 지인들에게 이메일을 한 통 보냈다. 4의 배수가 되는 해를 또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올해 11월 3일로 예정된 미국 대선을 중심으로 미국 정치를 알기 쉽게 풀어내는 팟캐스트를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이날 첫 방송을 내보낸 건 아니다. 다른 뉴요커들은 영화 같은 크리스마스와 설레는 송구영신의 시간을 보낼 때 아마존에서 주문한 제일 싼 마이크를 앞에 두고 집 식탁에 아내와 나란히 붙어 앉아 녹음하고 편집한 방송의 데모 파일을 친구들에게 보낸 것이다. (다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까마득하실 것 같은데, 2019년 크리스마스는 인류 대부분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뭔지 모르고 보낸 마지막 크리스마스였다!) 냉정히 평가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간단한 설문지도 첨부했다.
아메리카노. 에스프레소를 뜨거운 물로 희석한 커피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아내와 내가 시작하려는 방송의 제목 아메리카노는 “미국(America)을 알아가자(Know)”는 뜻이다. 2020년의 화두는 당연히 대통령 선거니까, 미국을 알아가려면 미국 대선과 정치를 알아보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두 정당의 후보를 뽑는 경선부터 쭉 함께 지켜보면서 미국이란 나라의 정치 문화, 선거 제도 등을 소개하고 두루 함께 공부할 생각이었다. 공화당은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도전한다고 선언했으니 경선은 건너뛸 테고, 민주당의 첫 번째 경선인 아이오와 코커스가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었다. 예년 같으면 새해 벽두에 아이오와 코커스를 시작하는데, 2020년부터 2월 초로 한 달 미뤄져 참 다행이었다.
자, 주제는 던졌는데, 미국에 관해서 뭘 어떻게 알아가면 좋을까? 아니, 그전에 무엇을 얼마나 알아야 미국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꼭 미국이 아니라도 어떤 대상을 잘 아는 전문가가 되려면 어느 정도 지식을 꿰고 있어야 할까? 사실 한국 사람 중에 미국을 아예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국에 있는 세 돌이 지난 조카도 영상통화할 때 "삼촌이랑 숙모 지금 어디게?" 하고 물어보면 "미욱!"이라고 답한다. 미국이 먹는 건지 장난감인지도 잘은 모르겠지만. (이제 네 돌이 지난 조카는 미국과 한국의 밤낮이 뒤바뀌는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됐다.) 그런데 미국을 정말 잘 아는 사람도 드물다. 사실 아무리 미국이 중요한 나라라고 해도 엄연히 남의 나라니까, 속속들이 잘 몰라도 사는 데 큰 지장은 없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미국이란 나라는 워낙 크고 복잡해서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또 연방제 국가라서 당장 신분증부터 주마다 다르고, 삶의 양식, 생각하는 건 더욱더 서로 딴판일 때가 많다. 원래 미국인, 언제부터 미국인이냐를 가지고 나누기도 상당히 애매한 이민자의 나라가 미국이다.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다 섞여 사는 곳이라서 “미국이 이렇다.”라고 단정하는 말은 대개 단면만 본 부정확한 평가나 얕은 감상일 때가 많다. 정치 제도와 선거 절차만 봐도 그렇다. 대통령 선거에 등장하는 선거인단 제도나 판사, 검사도 선거로 뽑는 것처럼 '미국이라 다른 것' 투성이고, 연방 정부와 주정부의 역학 관계처럼 '미국에만 있는 것'도 많다.
아내는 뉴욕대학교(NYU) 정치학과에서 미국 정치를 연구하고 가르친다. 한국에서 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길에 오른 게 2006년의 일이니, 벌써 미국 생활이 햇수로 15년차다. 나는 한국에서 방송기자로 일하다가 미국에서 공부하던 아내를 따라 2011년에 미국에 왔다. 어느덧 미국에 산 지도 10년째. 정치에 관심도 많고, 선거는 남들보다 더 열심히 챙겨보는 부부라고 자부하지만, 그럴수록 세상에는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참 많다는 걸 절감한다. 우리집에서 상식이라도 밖에 나가면 전혀 통하지 않을 때가 많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가 깜짝 당선된 지난 2016년 대선은 내게 미국이란 나라를 섣불리 예단했다가는 큰코다칠 수 있다는 걸 알려준 묵직한 경고였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해 소위 날고 긴다는 미국 언론이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내놓은 예측이 그렇게 보기 좋게 빗나갈 줄 누가 알았을까? 이런 말을 하면 "거봐, 내가 뭐랬어? 난 전부터 알고 있었다니까!"라는 사람 꼭 나온다. 내 주변에도 실제로 그런 예측을 한 사람이 있기는 하다. 중요한 건 누가누가 예측을 잘하나가 아니니 일단 넘어가자. 어쨌든 나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당시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자격으로 <한겨레21>에 매주 한 편씩 외신을 소개하는 글을 썼는데, 2016년 여름, 가을에 미국 대선과 관련해 쓴 글들은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려서 볼 수가 없다. 인터넷에서 검색해도 검색이 안 되기를... 계속 부정하고 싶은 이불킼 소재다. 아무튼 2016년 대선은 그동안 내가 보는 신문, 뉴스, 만나는 사람과 동료, 친구들이 만들어낸 엄청난 반향실 안에 갇혀서 살았음을, 어쩔 수 없는 확증편향과 소망편향을 잔뜩 안고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다.
팟캐스트의 제목과 모토를 "진짜 미국을 알려주마!" 같은 자칫 오만할 수 있는 문구 대신 "함께 미국을 알아보자"는 톤으로 정한 것도 2016년 대선의 교훈을 잊지 말고 꾸준히 반성하자는 의미였다. 미국에 산다고, 매일 미국 뉴스를 보고 듣고 읽는다고, 미국 정치를 공부하는 걸 업으로 삼는다고 모든 걸 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겸손하게 방송을 꾸려갈 생각이었다. 아메리카노2020은 미국이 그저 좋으니 같이 동경하자는 내용의 방송이 아니다. 반대로 끔찍한 곳이니 멀리하자는 비판이나 미국의 몰락이 임박했다는 어두운 전망으로 팟캐스트를 채울 생각도 없었다. 그보다는 좋아하더라도 정확히 알고 좋아하고, 단점을 이야기하더라도 정확히 알고 지적해야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을 테니, 그런 차원에서 제도가 작동하는 기제나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고, 이를 분석한 사회과학 연구를 곁들여 미국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알기 쉽게 풀어볼 계획이었다.
코로나19로 우리가 알던 미국은 송두리째 사라졌다. 어쩌면 이미 허울만 남았던 건데, 썩어가는 속을 보지 못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다 아킬레스건을 팬데믹이 정확히 타격하자 미국은 우리가 알던 ‘미국답지 않게’ 휘청였다. 양극화된 언론 지형의 양쪽을 부지런히 오가며 선거 제도와 미국 유권자의 특징을 분석하면 2020년 선거를 꼼꼼히 훑어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정치적 양극화, 가짜뉴스, 민주당이냐 공화당이냐, 오바마 대 트럼프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가 갑자기 툭 튀어나왔다. 코로나19로 드러난 미국이란 나라의 민낯은 오랫동안 방치해 손 쓸 수 없이 곪아 버린, 마치 영화 혹성탈출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자유의 여신상을 보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폐허 속에 모습을 드러낸 미국의 치부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온몸으로 느끼는 와중에도 믿기 어려웠다.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나라, 제일 부유한 나라, 민주주의의 글로벌 전도사를 자처해 온 초강대국 미국은 동시에 바이러스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도록 방역대책 한 번 가동조차 못한 나라, 돈 때문에 병원에는 갈 엄두도 못 내고 앓다가 목숨을 잃는 사람이 수두룩한 나라, 피부색이나 경제적 계급에 따라 바이러스에 노출되는 위험이 뚜렷하게 갈리는 나라, 정부가 나서서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려 하면 거기에 ‘사회주의' 딱지를 붙이는 나라였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바이러스에 국적을 붙여 외국인을 타자화하고 혐오를 조장하는 사람이 상상 이상으로 많은 나라이기도 했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는 바이러스에 노출되는 정도부터 극명히 달랐다.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고 생계가 막막해진 사람이 속출했지만, 같은 시기에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자 제로 금리에 신나게 빚내서 여덟 번째, 아홉 번째 별장을 쇼핑하는 부자들도 있었다. 간호사들은 방호복은커녕 마스크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채 코로나19 환자를 맞이하다 목숨을 잃었다. 그들에게 '팬데믹 시대의 이름 없는 영웅'과 같은 허울 좋은 찬사가 붙는 와중에 이들을 고용한 병원장, CEO는 플로리다에 있는 저택 같은 별장에서 '안전하게' 재택근무하며 자신에게 연간 보너스로 수백만 달러를 지급하는 안건에 결재했다.
원래는 아메리카노2020 팟캐스트를 시작하면서, 선거와 정치 제도를 통해 들여다보는 미국 정치 이야기를 책으로 써볼 생각을 막연히 했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미국 대선의 양상도 바뀌었고, 팬데믹 이후 미국에서 보고 듣고 느낀 점을 바탕으로 풀어내야 할 이야기도 자연스레 바뀌었다. 당연히 아메리카노2020에서 다룬 주제도 바뀌었다. 그래서 이방인인 한국인으로서 미국 뉴욕에서 코로나19를 겪고 바라본 경험을 풀어낸 책을 쓰게 됐다.
---------
괄호 안의 문장을 비롯해 몇몇 문장만 새로 넣었고, 나머지는 지난해에 쓰려던 책의 프롤로그 일부를 발췌했다. 끝내 탈고하지 못한 원고는 억지로 살려내지 않는 한 대부분 세상 빛을 못 보고 구글 클라우드 서버 어딘가에 데이터 조각으로 남을 것이다.
쓰고 싶은 글이, 하고 싶은 말이 여전히 가슴 한 구석에 있다가 불쑥 튀어나오기도 하고 입가와 머릿속에 맴돌다 머릿속을 뛰놀다 싸라기눈처럼 흩어지곤 한다. 그러다 아메리카노 팟캐스트를 처음 시작했을 때를 떠올렸다. 말장난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아메리카노를 시작한 비결은 아메리카노를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일단 시작하면 나머지는 어떻게든 되더라. 두 번째 시즌을 돌이켜 봐도 방송을 재개하기 직전이 가장 두려웠고 소극적이었다. 일단 시작하고 나면 길은 있다는 걸 팟캐스트 두 시즌을 통해 깨달았다. 교훈을 얻었다면 뭔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글도 마찬가지라면 써지는 데까지 한번 진득하니 써보자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브런치의 문을 두드렸다. 글을 잘 쓰는 재주도, 재미있게 쓰는 솜씨도 없지만, 메시만 축구하는 거 아니니까 화곡동 메시도 있고 쌍문동 메시도 있고 맨하탄 메시도 있는 거 아니겠나. 미국에 산 지 어느덧 11년째를 맞은, 영원한 이방인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믿기에, "미국을 알아가는 시간"이라는 팟캐스트 모토에 맞춰 미국에 사는 이방인의 이야기를 이 공간에 차근차근 모아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