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인 맨하탄
아내의 겨울방학을 맞아 한 달간 한국에 머물다 뉴욕으로 돌아왔다. 한 달 중에 열흘을 자가격리로 보낸 탓에 3주 남짓한 '자유시간'은 금방 가버렸다. 2020년 5월부터 1년 동안 아내의 안식년을 한국에서 함께 보낸 뒤 "앞으로 짧은 일정으로는 한국 가지 말자."고 다짐했었는데, 그 다짐이 참으로 무색해졌다.
"이제 집에 가자."고 할 때 떠오르는 목적지가 한국에서 미국으로 바뀐 건 3년 전 이맘때의 일로 기억한다. 미국 온 지 약 7~8년이 흐른 뒤, 뉴욕에 산 지는 2년 정도 지난 어느 겨울날이었다. 이번처럼 아내의 겨울방학을 맞아 한국에서 가족과 새해를 맞고 시간을 보내다가 뉴욕에 오는데 '아, 이제 집에 가면 좀 쉬고, 일도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인천공항 가는 비행기를 탈 때 마음이 편해지면서 '집에 간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말이다. 물론 고국에 가는 설렘은 늘 있다. 한국에 있는 가족, 친구들을 만나는 건 언제나 소중하고 즐거운 일이지만, 내가 발 딛고 사는 공간, 뿌리내리고 일상을 보내는 곳을 '집'이라고 한다면 뉴욕, 뉴욕이 내 집인 게 맞기는 하다. 어쩌면 더 일찍 이런 생각이 들었어야 하는데, 내가 적응이 느렸던 탓인지도 모른다. 그전까지는 미국에서 한 도시에 3년 넘게 산 적이 없어서 정을 못 붙였던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뉴욕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집이라고 꼭 다 좋은 법은 없다. 이젠 익숙해진 것도 많지만, 맞부닥치는 미국 사회와 제도는 여전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다. 어쩌면 영원히 적응하지 못할 수도, 아니 그러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대표적인 게 의료비다.
미국 의료제도가 끔찍하리만치 비효율적이라는 건 이미 한국에도 잘 알려졌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오기 전에도 이미 미국은 "GDP의 1/6을 의료비로 쓰는 나라", "그런데도 천문학적인 병원비, 약값 때문에 아파도 제대로 치료받기 어려운 나라"로 묘사되곤 했다. 오피오이드 남용 위기 등 절망의 죽음(death of despairs)이 만연한 탓에 OECD 회원국 중에 평균수명이 줄어드는 몇 안 되는 나라가 미국인데, 이 또한 제 구실을 전혀 못 하는 의료제도 탓이 크다. 그러나 이런 통계들은 사실 한국에서 들으면 남의 나라 얘기일 뿐이며, 미국에 살아도 병원 갈 일이 없으면 알기 힘들다. 일단 건강해야 행복할 수 있는 건 전 세계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만, 미국에서는 특히 건강하지 않으면 아픈 것 말고도 경제적인 고통이 너무 크다.
한 달 만에 집에 와서 손부터 씻고 짐을 풀기도 전에 인터넷부터 연결해서 새로 청구된 병원비 액수를 확인했다. 통풍 때문에 한국 가기 전에 병원에 가서 진료받고 약을 탔는데, 의사를 한 번 볼 때마다 한국 기준에선 '의료비 폭탄'이 날아왔다. 11월에 처음 병원에 간 진료비는 12월에 냈는데, 12월에 한 번 더 의사를 만나서 앞으로 경과를 지켜보며 어떻게 하겠다는, 전에 했던 얘기를 또 10분 정도 듣고 왔었다. 처음 낸 병원비도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비싸서 이게 끝인 줄 알았는데, 볼 때마다 돈을 또 내야 하는 줄은 몰랐다. 어쨌든 한국에서 자가격리를 끝마치고 상큼하게 2022년을 시작한 이튿날 진료비가 새로 청구됐다는 이메일이 날아왔는데, 미국 밖에서는 보안 때문에 서버에 접근 자체를 막아놓아서 병원 포털에 접속할 수가 없었다. 또 수십만 원이 나왔을까 봐 한국에 있는 내내 그 생각만 하면 속이 더부룩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병원비가 얼마 나왔는지부터 확인한 것이다. 수십만 원까지는 아니고 십수만 원이 나왔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걸까? 아, 요즘 환율이 높으니 20만 원이 넘는 돈이다. 10분 남짓 의사 만나고 낸 돈으로는 터무니없다.
한국 기준으로 보면 날강도가 따로 없지만, 미국에선 흔한 일이다. 심지어 의료보험이 있는데도 이렇게 비싼 돈을 줘야 한다면 의료보험 없는 사람은 아파도 그냥 편의점에서 파는 진통제로 버티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체 국민의 절반 정도는 전국민 의료보험(universal healthcare)을 사회주의 제도라고 생각하는 미국이다 보니, 공공 부문에서 관리하는 의료보험은 민간 의료보험의 영역을 절대로 침범할 수 없다. 그 결과 병원과 제약회사, 의료보험 회사까지 아픈 환자를 치료하는 것보다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더 중요해진 미국 의료계의 매운맛을 통풍 때문에 맛보기로나마 경험했다.
수십만 원을 내고도 이 정도라 다행이라고 여길 수 있던 건 우리집으로 잘못 배송된 누군가의 의료비 청구 내역서 덕분이었다. 한 달 동안 우리집을 재임대(sublet)해 머문 분들께 우편함을 가끔씩 비워달라고 부탁드렸는데, 내 말을 깔끔하게 잡수셨는지 좁은 우편함은 온갖 광고 전단지와 스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스팸이 아닌 우편은 온라인으로 확인한 의료비 청구서와 미국에 사는 친구들이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와 연하장 몇 통이 전부였다. 그런데 의료비 청구서에 응급실을 이용한 값으로 7,500달러를 비롯해 총 8,500달러, 약 1천만 원이 청구돼 있는 것이다! 다행히 환자 부담금이 얼마인지 보니, 보험사에서 대부분 비용을 부담해서 100달러만 내면 된다고 쓰여있었다. 아니, 다행인 게 아니라 우리가 언제 응급실에 갔었지? 그만큼 아픈 적 없었는데? 황급히 청구서 수취인을 보니 다행히 우리한테 온 청구서가 아니었다. 누군가 집 주소를 잘못 적었는지 우리집으로 잘못 배달된 편지인데, 스팸이 하도 많아서 이름도 확인 안 하고 열어봤다가 목격하게 된 미국 의료의 참모습이었다.
뉴욕 맨하탄 아파트 중에 세탁기가 집 안에 있는 곳은 정말 부자들만 살 수 있는 비싼 집이다. 비행기로 치면 비즈니스 클래스와 1등석의 중간쯤 되지 않을까? 사실 비즈니스 클래스도 타본 적이 없어서 얼마나 비싼지 가늠이 되지 않지만. 아무튼 우리 아파트도 지하에 공동 세탁실이 있는데, 세탁기를 돌려놓고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를 같은 층 사는 이웃 아주머니와 함께 탔다. 오랜만이라며 잘 지냈냐고 안부를 물으시길래 한 달 동안 한국 갔다가 오늘 막 돌아왔다고 했더니, 오미크론 폭풍 잘 피해 갔다며 우리 층에서만 거의 절반은 오미크론 변이에 감염된 것 같다고 말해주셨다. 다행히도 심하게 아팠던 사람은 없는 듯하고, 더 다행인 건 이제 걸릴 만한 사람은 다 걸려서 뉴욕시 전체로 보더라도 확진자 숫자도 줄어드는 추세라는 귀띔과 함께. 백신 접종률이 높아서 걱정을 좀 덜 하긴 했지만, 오미크론의 전염력은 듣던 대로 엄청 강한 듯하다.
미국에는 해외 입국자 자가격리 규정이 없다. 코로나19 확진자를 대상으로는 자가격리 규정이 있긴 한데, 법으로 정한 사항은 아니고 권고 수준이다. 뉴욕 친구들 중에 특히 집에 아이가 있는 부모들은 권고 사항을 철저히 지키는 편이지만, 미국 전체로 보면 권고는 권고일 뿐 신경 안 쓰는 사람이 더 많아 보인다. 하긴 마스크 안 쓰고 백신도 안 맞겠다는 사람이 태반이니... 보건 당국이 자가격리를 강제하겠다고 나서면 아마도 진짜 난리가 날 것이다.
지난해 5월에 뉴욕에 돌아올 때만 해도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피하고 보건 당국의 방역 지침을 최선을 다해 따르겠다"는 내용의 서약서에 서명해야 했는데, 이번에 보니 그 형식적인 절차도 없어졌다. 한국에 가서는 미리 예약한 에어비앤비 숙소 밖을 코로나19 검사받으러 열흘 동안 딱 두 번 나간 게 전부였지만, 뉴욕에 와서는 곧바로 짐 풀고 집안 청소하고 빨래 돌려놓고 나서 시차 때문에 쓰러지기 전에 마트에 장 보러 갔다.
미국과 한국의 코로나19 팬데믹의 풍경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를 꼽으라면 아마 마스크일 것이다. 한국에선 실내에서 밥 먹거나 커피를 마실 때를 제외하면 — 이 예외가 너무 커서 문제긴 하지만 — 마스크를 다들 꼼꼼히 잘 쓴다. 하늘이 무너지기 전엔 재택근무를 용인하지 않는 한국 기업들 덕분에 출퇴근 시간 지하철은 요즘도 만원인데, 마스크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확진자가 폭증했을 거다. 어쨌든 그런 한국에 비해 미국에선 마스크를 참 안 쓴다. 나중에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미국에선 뉴욕 같은 대도시가 여러모로 예외인데, 마스크를 대체로 잘 쓰고 다니는 뉴욕 사람들도 실내에서만 쓰고 실외에선 대체로 마스크를 벗었다.
그런데 오미크론 이후 풍경이 좀 바뀐 듯하다. 아직 돌아온 뒤 밖에 한 번밖에 안 나가봐서 정확하진 않지만, 밖에서도 마스크를 쓴 사람이 절반 정도는 돼 보이는 점이 눈에 띄었다. 우리도 한국에선 밖에서도 마스크를 쓰는 게 영 불편했는데, 어느덧 또 거기에 익숙해졌는지 뉴욕 와서도 집 밖에선 실내든 실외든 마스크를 쓰고 다니고 있다. 다른 무엇보다 미국에선 병원에 가야 할 만큼 아픈 일은 최대한 피하는 게 상책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