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 정당과 두 개의 미국
뉴욕에 돌아온 지 오늘로 꼭 일주일이 됐다.
한국이었다면 아직 제대로 밖에 나가보지도 못한 자가격리 여드레 차 아침일 테지만, 미국에선 자가격리를 할 필요가 없어서 그런지, 아니면 시차 적응에 실패해서 엄한 시간에 3~4시간씩 쪽잠도, 숙면도 아닌 찌뿌둥하기 그지없는 잠을 하루에 두 번 정도 자다 보니 그런지, 아무튼 돌아온 지 한참 된 것 같은데 아직 열흘이 채 안 지났다.
뉴욕은 다시 꽤 움츠러들었다. 오미크론 변이의 위세가 대단하긴 한 모양이다. 한국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확진자 숫자가 다시 늘어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동네 식당이나 바, 가게가 북적북적했다. 지금은 모든 게 다 폐쇄됐던 2020년 봄만큼은 아니지만, 많은 곳이 다시 썰렁해졌다.
집 앞 워싱턴스퀘어 공원은 겨울 치고도 한산했다. 공원 가운데엔 분수가 있고, 그 뒤로 왜 저게 저기 있는 건지 매번 연원을 찾아보고도 돌아서면 까먹는 커다란 개선문이 있는데, 그 개선문 아래 설치했던 크리스마스트리를 2월이 얼마 안 남은 이제야 치우고 있었다. 보통 늦어도 1월 둘째 주에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치웠던 것 같은데, 아마 이 또한 팬데믹 때문에 작업이 미뤄진 것 아닐까 싶다.
집에서 열 블록 정도 걸어가면 유니온스퀘어 광장이 있다. 광장에선 월, 수, 금, 토 일주일에 네 번 장이 선다. 신선한 채소, 과일을 전혀 싸지 않은 값에 살 수 있는 애증의 장소다. 그래도 뉴요커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100년도 더 된 전통을 자랑하는 시장인데, 여기도 평소보다 무척 썰렁했다. 늘 매대도, 손님도 가장 많은 토요일에 주로 가다가 수요일에, 그것도 체감 온도가 영하 7~8도는 족히 됐을 추운 날 갔으니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아침부터 벌써 파장 같은 모습을 보니 갑자기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짜증이 치밀어온다.
'어우, 이 징글징글한 코로나, 진짜 언제 끝나려나...'
그러다 문득 이번에 한국에서 만난 친구들한테 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뉴욕 있는 친구들 끝내 오미크론 다들 걸리는 것 같더라. 우리도 안 걸리고는 못 배길 듯, 나도 한 번 걸려야 이놈의 코로나도 끝나지 않을까 싶어."
그러게, 분명 여기저기 그렇게 말하고 다녔다. 체념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부모님은 큰일 날 소리 하지 말라며 걱정하셨지만, (밖에선) 마스크도 잘 안 쓰는 뉴욕이다. 게다가 아내가 일하는 학교는 새 학기에 대면 수업을 예정대로 한다고 공지했다. 언제 어디서 바이러스가 옮겨오더라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다.
걸릴 거면 부스터샷 맞은 지 얼마 안 된 지금 후딱 걸려서 무증상이면 제일 좋고 아파도 잠깐 앓고 넘어가자고 생각할 수 있는 건 물론 백신이라는 믿는 구석 덕분이기도 하다. 여전히 막상 진짜 감염되면 어쩌나 무섭기도 하지만, 팬데믹 3년 차를 맞는 우리에게도 내성이란 게 생겨서일까? 두려움의 결이 예전처럼 빼곡히 촘촘하지 않고, 어딘가 엉성하고 구멍이 숭숭 뚫린 느낌이다.
미국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 첫 확진자가 나온 게 2020년 1월 말이었다. 이제 만으로 2년을 꽉 채웠고, 햇수로 3년째를 맞이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웅크린 채 살아야 할까?
미국은 (한국 기준으로 보면) 방역에 완전히 손을 놓아버린 터에 이미 100만 명 가까이 코로나19로 목숨을 잃었다. 정확한 집계로는 87만 7,815명이라고 하지만, 코로나19로 병상이 부족해지면서 가뜩이나 비효율적인 의료 체계가 여러 차례 마비된 탓에 숨진 환자들이나 직접적인 사인만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합병증이 아니었을 뿐 사실상 코로나 때문에 숨진 사람들을 더하면 "사망자 100만 명"이라고 써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팬데믹 3년 차에 접어드는 시점에 옷깃만 스쳐도 전염되는 것 같은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가 활개를 치면서 이제는 코로나19 팬데믹에 대처하는 자세도 달라져야 할 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다. 뉴욕타임스가 정확히 이와 관련한 설문조사를 했고, 그 기사를 쓴 데이비드 리온하트 기자가 팟캐스트 데일리에 출연했다.
미국은 과연 "위드 코로나"를 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코로나에 대처하는 자세를 다같이 바꿔야 할 텐데 그게 가능할까? 이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뉴욕타임스는 미국인 4,400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앞으로는 어떻게 될 거라고 내다보는지 두루 물었다.
미국인들은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나이 든 사람이 젊은 사람보다 감염됐을 때 중증을 앓을 확률이 높으니 나이 든 사람이 더 걱정하고 조심할까? 아니었다. 응답자 전체를 놓고 보면 젊은 사람도, 나이 든 사람도 비슷하게 코로나 바이러스를 걱정했다. 그럼 뭐에 따라 태도가 달라질까?
"붉은 바다 위에 점점이 떠 있는 푸른 섬들."
미국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에 꽤 적합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이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있을 때 다시 하기로 하자.
미국인들 사이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를 향한 태도가 가장 명확하게 갈라지는 기준은 나이나 인종, 성별, 지역이 아니라 지지 정당이었다. 민주당, 공화당 중에 어느 정당을 지지하는지 알면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그 사람의 태도를 가장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말이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여전히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두려워하며 걱정을 놓지 못한다. 마스크도 열심히 쓰고 백신도 맞을 수 있을 때 일찌감치 다 맞았다. 부스터샷을 맞은 사람들 대부분이 민주당 지지자였다. 공화당 지지자들의 태도는 정반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65세 이상 공화당 지지자들 가운데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될까 봐 두렵다고 답한 사람은 47%였다. 같은 질문에 18~34세 민주당 지지자들 중에는 70%가 걱정된다고 답했다. 젊은 민주당 지지자보다 나이 든 공화당 지지자들이 바이러스 걱정을 덜 한다. 백신 안 맞은 사람은 대부분 공화당 지지자들이니까 정작 고위험군에 속한 사람들이 걱정을 덜 하는 셈이다.
마스크, 백신을 비롯해 코로나19 바이러스 전반에 대한 생각, 태도는 총기 소유, 낙태, 기후변화처럼 정치적 성향에 따라 뚜렷하게 갈리는 주제가 됐다. 공화당 지지자들은 대체로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험을 평가절하하고, 반대로 민주당 지지자들은 필요 이상으로 코로나 걱정에 휩싸여 있다.
공화당 지지자 가운데 40% 이상이 코로나19 백신을 맞지 않았다는 통계가 있다. 백신 안 맞았으면 바이러스 앞에서 용감하게 굴어선 안 되는데, 그 사람들은 "그깟 감기"라며 코로나 알기를 우습게 안다. 사망자 100만 명 가운데 적잖은 숫자가 그렇게 백신도 안 맞고, 마스크는 나약함의 상징이라며 안 쓰며 만용을 부린 이들이다. 그렇지만 한 번 굳어진 생각은 좀처럼 바뀌지 않고, 지금도 백신 관련 가짜뉴스는 판을 친다. 백신 안 맞겠다고 마음을 굳힌 이들을 설득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요즘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장려하는 발언을 하고 다니면서 지지자들을 벙찌게 만들고 다니던데, 그에 관한 이야기도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해보기로 하자.
오늘은 팟캐스트에서 더 흥미로웠던 부분, 즉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전한 메시지를 같이 곱씹어보고자 한다. 한마디로 줄이면 "백신 맞았으면 오미크론 때문에 크게 잘못될 일 없는 거 이제 확실해졌잖아. 걱정 그만 내려놓자. 걱정하느라 치른 비용, 희생하고 포기해야 했던 것들이 많아도 너무 많아." 정도가 되겠다.
미국에서 지난 2년은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을 막는 게 중요한 과제였다. 그럼에도 누적 확진자 숫자가 7천만 명이 넘으니 우리 기준에선 이해하기 어려운 면도 있지만, 아무튼 이제는 진짜 정상화를 고민해보자는 거다. 무엇보다 과학을 믿어서 백신을 맞았다면, 백신 맞아서 항체 생긴 사람들은 가장 지배적인 변이인 오미크론에 걸리더라도 중증을 앓을 확률이 매우 낮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안심하자는 거다. 백신 접종자가 오미크론에 감염돼 목숨을 잃을 확률은 자동차 사고로 숨질 확률보다도 낮다고 리온하트 기자는 말했다.
반면에 정상화를 늦춘 탓에 쌓인 문제는, 치러야 할 비용은 계속 불어났다. 미국 사회에서 폭력 범죄가 늘었고, 미국인들의 혈압도 높아졌으며, 정신건강 문제, 약물 오남용 문제도 훨씬 심각해졌다.
백신이라는 효과적인 무기가 있으니,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예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은 설득력 있었다. 백신을 안 맞겠다는 사람을 설득하기가 불가능에 가깝다면, 일상을 회복하는 열쇠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쥐고 있다고 봐야 한다. 걱정을 내려놓고 코로나 때문에 삼갔던 일들을 조금씩 해보고, 그렇게 일상을 찬찬히 되살려보는 거다.
가끔 자리 잡고 앉아서 일하던 카페에 가봤다. 음악 소리도 크고 바짝 붙어 앉아 왁자지껄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 사이에서 일하다 보면 어마어마한 소음이 그런대로 괜찮은 MC 스퀘어 백색 소음으로 변하는 곳이었다. 물론 영어를 잘 못해서 주변에서 하는 말이 잘 안 들리는 탓일 수도 있다. 한국 사람들이 하는 얘기는 서너 자리 건너 하는 얘기도 또렷이 들리긴 한다. "어느 동네 재개발이 어떻게 됐네, 누가 어디 땅을 사서 대박이 났네..." 이런 얘기를 뉴욕에서 듣고 있으면 아찔하다. 아니 왜 여기까지 와서... 아무튼 카페는 지난해 여름에 갔을 땐 다시 테이블을 펴고 손님을 받았었는데, 안타깝게도 다시 테이블을 치우고 테이크아웃 주문만 받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뉴욕의 따릉이 씨티바이크를 타고 가야 하는 또 다른 책방 카페에 갈 참이었는데, 아뿔싸!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아직 싸라기눈이지만, 오후부터는 미국 북동부 전역에 눈폭풍이 예고돼 있다. 오늘까지는 집콕이다. 다음 주부터는 리온하트 기자의 권고를 따라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