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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메리카노 May 11. 2022

“주요 이슈”가 된다는 것

로 대 웨이드와 중간선거

100만 명.

미국의 코로나19 공식 누적 사망자가 100만 명을 넘었다. 우리는 만, 억, 조 단 위가 0이 4개 붙을 때마다 바뀌지만, 미국은 thousand, million, billion의 단위가 0이 3개 붙을 때마다 바뀌어서 그런지 밀리언이라는 이정표가 더 크게 느껴진다. 좋은 일이라면 이정표를 지나는 마음이 뿌듯하겠지만, 코로나19 사망자 100만 명이라니 새삼 절망스럽다. 보통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무언가를 나타낼 때 어림잡아 쓰는 큰 숫자가 100만 아닌가. 심지어 공식 집계가 이럴 뿐 실제 사망자는 그보다 두 배, 세 배에 이를 거라는 설득력 있는 분석도 많다. 곰곰이 생각하면 아득하고 슬픈 일이지만, 운 좋게 살아남은 이들은 이제 거의 일상을 회복했다. 이따금 마음 한구석에 똬리를 틀던 괜한 죄책감도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실은 무척 잔인한 말과 함께 무뎌졌다.

며칠 전에는 뮤지컬 표를 사뒀던 친구가 갑자기 다른 일이 생겨 뉴욕에 못 오는 바람에 얻게 된 표로 뉴욕 산 지 5년 만에 처음으로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보고 왔다. 훌륭한 공연도 공연이었지만,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 공연이 끝난 시각 밤 11시 타임스퀘어를 가득 메운 관광객을 보니 정말 다른 세상 같았다. 팬데믹은 이제 진짜 끝난 것처럼 느껴졌다. 공연 중에는 마스크를 계속 써달라는 팻말을 들고 덤덤한 표정으로 객석을 배회하던 극장 직원만이 타임머신을 타고 몇 달 전에서 현재로 오신 분 같았다.

그래도 극장 안에선 다들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극장 밖 타임스퀘어에선 마스크 쓴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수많은 일상이, 매주, 매월, 매년 으레 하던 것들이 속속 돌아왔다.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지난 2년 사이 기억 속에선 희미해졌지만, 코로나19 이전부터 달력에 기록해둔 대로 일어나던 일들이기에 잊지 않고 돌아와 기억을 깨운다. 매년 이맘때 열리던 NYU 졸업생(과 가족)을 위한 행사도 그중 하나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금요일 오전. 지난 2년간 좀처럼 창고 밖으로 나올 일 없던 NYU 텐트와 비품들이 집 앞 거리에 진을 쳤다. 최장 케이크 부문 기네스북 등재를 노리는 듯한 기다란 케이크도 돌아왔다. 행사엔 역시 음악을 빼놓을 수 없다. 라이브 뮤직이 흥을 돋운다. 사실 내 기억 속에 이 행사는 낮잠을 꼭 자야 하는 내 일상을 망쳐놓은 훼방꾼으로 기록돼 있다. 그때도 주범은 바로 저 음악이었다. 집에 있으면 주파수 낮은 베이스 소리 때문에 잠이 들지 않는다. 피곤해서 자려고 누웠는데 못 잘 때가 제일 찌뿌둥하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오늘은 낮잠 자지 말고 나가자.’고 마음먹고 나와서 들어보면 반주와 멜로디, 보컬을 온전히 합쳐 놓은 음악 자체도 별로다. 그저 내 취향이 아닌 거겠지.

실은 그 전날도 낮잠을 제대로 못 잤다. 잠이 들었다가 깼는데, 낮잠을 깨운 건 전자기타, 베이스 소리가 아니라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목청껏 질러대는 고함 소리였다. 아파트 뒷길은 보통 차가 잘 다니지 않는 편이라 구급차, 소방차가 맨하탄 동서를 가로지를 때 지름길로 택하곤 하는데, 한산한 저 길이 요 며칠 꽤 바빴다.

“임신중단권은 건강을 위한 권리다! (Abortion is healthcare!)”

이날 거리는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을 뒤집으려는 대법원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차지했다. 구호를 가만히 들어보면 주로 여성의 목소리가 많았다. 아무리 집 앞 거리에 건물들이 빈틈없이 붙어 있어서 소리가 반향실처럼 위로 잘 퍼진다고 해도 창문도 안 열어놓은 9층 우리집에서 내가 낮잠을 못 자고 깼다는 건 구호 소리가 그만큼 절박했단 뜻이다. 베란다에 나가보니 마이크는 물론 확성기도 없이 외치는 구호가 똑똑히 들렸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무엇인지, 지금 대법원이 심리 중인 관련 소송은 무엇인지, 이번에 대단히 이례적으로 대법관들이 사전에 논의한 문서가 유출된 건 어떻게 된 일인지 등에 관해선 아메리카노 다음 에피소드에서 흐름을 짚어볼 생각이다. 마침 지금 읽고 있는 책 “커리어 그리고 가정”에서 경구 피임약의 발명과 보급이, 임신과 피임, 출산을 결정하는 주도권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넘어온 것이 불러온 영향 – 골딘 교수는 이를 ‘조용한 혁명’이라고 불렀다 - 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다.

오늘은 그보다 같은 이슈를 둘러싼 푸른 섬과 붉은 바다의 뚜렷한 온도 차이에 관해 생각해보려 한다. 아무리 붉은 해일이 방파제를 넘어도 절대 와닿을 수 없는 푸른 섬 한가운데 사는 내가 늘 마음 한편에 간직한 생각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서로 생각이나 의견이 다른 문제 이전에 아예 관심사가 달라도 너무 다른 데 관한 이야기다.

가족계획연맹은 이번 주말 전국적으로 대규모 집회를 조직하고 있다. 지도에 표시된 지역들은 대부분 푸른 섬이다.

우리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는 여성의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절을 보장하고 돕는 단체 가족계획연맹(Planned Parenthood) 지부가 있다. 푸른 섬에서는 어제 시위대가 외치던 구호가 상식에 속한다. 임신을 중단할지 말지는 당사자가 스스로 판단해 결정할 일이지 국가나 정부가 개입해선 안 되는 영역이다. 여기서 당사자란 궁극적으로는 임신한 여성 본인이 되겠지만, 반드시 임신부만 지칭하는 건 아니다. 경우에 따라 커플이 될 수도 있고, 가족이 될 수도 있다. 다만 정부나 제도, 기관의 반대편에 있는 ‘개인’이다.


우크라이나 전황을 제치고 연일 뉴스 톱기사를 장식하는 이슈인 만큼 뉴스페퍼민트에서도 글을 두 편 소개했다.

앞의 글은 내가 아니라 다른 필진이 썼고, 두 번째 글은 내가 썼다. 실은 푸른 섬 사상에 물든(?) 내 바람대로라면 앞의 글처럼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공화당과 보수 진영, 붉은 바다가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파기하더라도 올해 중간선거에서 그 때문에 심판받을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붉은 바다에선 여성이 임신을 중단하지 못하게 정부가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렇다기보다 이 문제에 대부분 큰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한 것 같다. 워싱턴포스트 칼럼에서 지적했듯 유권자들이 임신중단권 문제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슈만 나열해도 열 손가락으로 모자라다.

요즘 미국 주유소에 많이 붙어있는 스티커. 기름값이 1~2년 사이에 두 배 이상 올랐다. 인플레이션은 임신중단권을 둘러싼 논란보다 중간선거에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원래 선거란 그런 거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일까? 그렇게 냉소적으로 넘어가기엔 올여름 대법원이 유출된 문서의 내용대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파기하면 피해받을 사람들이 너무 많다. 며칠 전 거리를 메운 여성들의 절박한 외침이 여전히 귓가에 생생하다.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는 않지만, 로 대 웨이드를 지켜야 한다고 믿는 시민들이, 가족계획연맹이, 민주당이 효과적인 전략을 세워 싸우기를 기대한다. 누구를 목표로 삼아 캠페인을 진행하고, 어떤 오해나 편견을 바로잡기 위해 논리를 어떻게 세우느냐를 논의하기 전에 전략의 최우선 순위로 삼아야 하는 건 이 이슈 자체를 “주요 이슈”로 만드는 일이어야 한다. 월드컵 조별 예선도 통과하기 전에 16강 걱정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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