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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메리카노 May 05. 2022

붉은 해일, 기.어.이 방파제를 넘다

로 대 웨이드 판결 50년 만에 뒤집은 대법원

춘래불사춘.

봄이 왔지만, 올봄엔 도통 봄 다운 날이 잘 없었다. 쌀쌀하다 못해 온몸이 으슬으슬 떨릴 만큼 추운 날도 많아서 겨울옷 드라이클리닝을 지난 주말에야 세탁소에 맡기면서도 불안할 정도였다. 비가 내려도 포근한 날과 신록을 재촉하는 봄비라기보다 낙엽 위에 무심히 떨어지는 시린 가을비처럼 느껴지곤 했다.

꽃은 즐길 새도 없이 시린 비바람에 졌다.

지난 주말에는 아메리카노 새 시즌 두 번째 에피소드를 녹음했다. 그런데 처음 시도해 본 녹음 방식 때문에 탈이 났다.

원래는 지난 시즌부터 아메리카노 대부분 에피소드를 맨하탄 미드타운에 있는 팟캐스트 스튜디오에 가서 녹음했다. 두 시간 녹음하는 데 드는 비용은 $136로 값은 꽤 나가지만, 전문가의 손길과 훌륭한 장비빨 덕분에 음질 걱정에서 해방됐었다. 그런데 아내와 내가 지난주에는 도저히 스튜디오에 갈 시간을 낼 수 없어서 토요일 오전에 아메리카노 클래식 느낌을 살려 가내수공업으로 에피소드를 녹음했다.

처음엔 2년 전 팬데믹이 막 도지기 시작할 때 집에 갇혀서 마이크 하나를 두고 둘이 오붓하게 녹음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익숙한 방식으로 녹음할까 하다가 최근에 아는 분이 시도한 방법을 따라해 보기로 했다. 각자 다른 곳에서 줌으로 통화하면서 따로 녹음한 음성 파일을 나중에 합치는 방식이다. 줌으로 대화를 직접 녹음하면 음질도 안 좋고 인터넷 상태 때문에 버퍼링이 생길 수 있지만, 각자 컴퓨터에 파일을 녹음해두면 그럴 걱정이 없었다. 

준비왕인 아내가 재미있고 유익한 뒷이야기, TMI를 알차게 준비해온 덕분에 두 시간 동안 신나게 녹음한 뒤에도 다루려던 내용의 절반밖에 못 다루고 녹음을 마쳤다. 그런데 편집하려고 녹음 파일을 들어보니 생각지 못한 난관이 도사리고 있었다. 우선 음질이 들쭉날쭉했다. 때론 마이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서 말해서 소리가 작았고, 그러다 갑자기 그 사실을 깨달은 듯 마이크에 얼굴을 바짝 대고 녹음한 부분에선 래퍼가 비트박스를 넣은 것처럼 수많은 파열음이 잇달아 새겨졌다.

한 명이 이야기하는 부분의 음량은 번거롭더라도 수동으로 조절하면 될 텐데, 문제는 둘이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거나 오디오가 겹칠 때였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아메리카노의 매력 중 하나가 요한 크루이프나 펩 과르디올라도 감탄할 아내와 나의 눈부신 티키타카인데, 줌으로 나눈 대화에 시차가 있었는지 서로 반응하고 넣어주는 추임새의 타이밍이 미세하게 엇갈렸다. 또 아내가 한창 책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을 때 내가 마이크에 너무 바짝 붙어있었는지, 내 숨소리가 거슬릴 만큼 들리기도 했다. 파일을 이미 합쳐놓은 뒤라서 조절하기도 어렵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집의 막막한 가시밭길 앞에서 어젯밤에 가편집을 끝내려다 좌절하고 탈진한 채 잠이 들었다. 멀가중 가중멀중, 강약중강약, 덩기덕 쿵더러러 쿵기덕 쿵덕 느낌의 대화를 정리하고 편집하는 데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다는 변명을 여기에 남겨두려 글타래를 열었다. 늦어도 한국 시각으로 금요일 아침까지는 에피소드를 올릴 생각이다.


사실 팟캐스트 편집하느라 바빠야 하는, 아니 실제로 정신없는 와중에 굳이 브런치에 글을 쓰는 건 미국이 어쩌면 오랫동안 전환점으로 기록될 만한 순간을 바로 지금 지나고 있는 것 같아서다. 아메리카노 브런치를 통해 함께 들여다볼 미국의 모습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붉은 바다와 푸른 섬의 대조, 다른 하나는 지난번 글에 언급한 '가만 보면 붉은 바다도, 푸른 섬도 별반 다르지 않은 보랏빛 미국'이다. 둘 중 하나가 맞고, 다른 하나는 틀리다고 할 수는 없다. 이런 모습도 있고, 저런 모습도 있는, 둘 다 분명 미국이다. 오늘 소개할 미국의 모습은 이 가운데 전자에 해당하는, 서로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미국이다.


이번 일을 처음 보도한 건 폴리티코(Politico)였다. 전체 대법관 9명 가운데 6명이 보수 성향 판사로 채워진 미국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을 기어이 뒤집어 여성의 임신중절(낙태) 권리를 심각하게 제약하기로 내부 논의를 마쳤다는 내용이었다. 미국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내린 건 반세기 전인 1973년 1월 22일이다. 여성의 임신중절권을 빼앗거나 제약하는 건 극단적 기독교 단체들을 비롯한 보수 진영의 숙원이었는데, 마침내 붉은 해일이 푸른 섬의 방파제를 넘어선 것이다.

이번 일은 어쩌면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 대법관의 사망으로 발생한 대법관 공석을 트럼프 대통령이 에이미 코니 배럿 판사로 교체할 때부터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어쨌든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 "증언들"에 나오는 길리어드라는 전체주의 국가가 순전히 소설가의 상상력의 산물이 아닐 수 있다는 섬찟한 경고로 느껴진다. 

뉴욕타임스가 정리한 지도

지도는 아래 뉴욕타임스 기사에서 가져왔다. 지도에 찍힌 점들이 임신중절 시술을 해주는 병원, 클리닉들이다.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고 나면 임신중절을 금지할 것으로 예상되는 주들이 실선으로 표시된 주들이고, 그 안에 빨간 점으로 표시된 곳이 더는 임신중절 시술을 할 수 없게 될 병원, 클리닉들이다. 임신중절을 하고 싶어도 시술을 받기 어려워지는 지역을 색칠해 표시했는데, 색이 짙어질수록 임신중절권이 심하게 제약되는 곳이다. 붉은 바다와 푸른 섬을 표시한 선거 결과 지도와 겹쳐보면 대부분 붉은 바다에 해당한다. 

미국은 판례가 법적 효력을 지니는 보통법 국가다. 로 대 웨이드 판결 이후 지난 50년간 쌓인 판례와 6:3이라는 압도적인 구도를 토대로 헌법을 다시 해석하려는 대법원의 싸움은 서로 물러설 수 없는, 아주 긴 싸움이 될 것이다. 당장 오는 11월 중간선거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슈다.

앞으로 여러 번에 걸쳐 자세히 들여다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오늘은 아메리카노 다음 에피소드 업로드가 늦어지는 이유를 구구절절 변명하려고 쓴 글인 만큼, 로 대 웨이드를 둘러싼 논쟁에 관한 이야기는 새뮤얼 앨리토 대법관과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일단 줄인다.


폴리티코가 확보한 대법원 의견서—문서가 유출된 경위를 두고도 갑론을박이 펼쳐지고 있다—를 쓴 앨리토 대법관은 보수 성향 판사 6명 중 한 명으로 오랫동안 로 대 웨이드를 비판해왔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은 처음부터 아주 잘못된 것이다. 이 판결은 반드시 번복돼야 하고, 이제는 낙태 문제를 헌법이 아니라 시민이 뽑은 대표(정부)가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 - 앨리토 대법관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은 유출된 대법원 문서의 내용에 격분한 많은 푸른 섬 시민 중 한 명이다. 지금껏 내가 본 워런 의원의 모습 가운데 아마 가장 격앙된 모습이 아닐까 싶다. 영상 속 워런 의원의 발언의 대강은 이렇다.

제가 지금 이렇게 화가 난 이유는 분명합니다. 공화당과 보수 진영이 오랫동안 시도한 끝에 저지르려는 공격의 피해가 미국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계층의 여성에게 집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자들은 어렵잖게 보호받을 수 있어요. 부유한 여성들은 비행기 타고 다른 주에 가서, 다른 나라에 가서 임신중절 시술받으면 돼요. 가난한 여성들은? 아이들을 먹여 살리려고 투잡, 쓰리잡을 해야 하는 싱글맘들은? 강간 피해자들은? 이들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보루를 저들은 빼앗아가려 하고 있어요. 나는 반드시 끝까지 싸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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