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발견" 저자 타라 웨스트오버
금요일에 서론 빌드업만 하고 정작 번역은 못 올렸는데, 타라 웨스트오버가 쓴 칼럼 번역해 올립니다. 책을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자는 동시대를 살았다고 믿기 어려운 만큼 극단적인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책에 등장하는 저자의 부모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행동, 특징, 사고방식은 어쩌면 우리가 흔히 아는 미국과 완전히 다르면서도 엄연히 미국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그래서 미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례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에 잠깐 언급했던 "붉은 바다에 점점이 떠 있는 파란 섬들" 이야기를 얼른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우리가 보는 미국은 99% 파란 섬들입니다. 심지어 미국 사는 친척, 친구들도 파란 섬만 보고 사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반대로 "배움의 발견"에 나오는 미국은 붉은 바다, 그것도 깊은 해구 같은 곳입니다. 코로나19 백신을 절대 안 맞겠다는 사람들, 트럼프를 지지하며 지난해 1월 6일 국회의사당에 쳐들어갔던 사람들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단서도 이 책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증언들"이나 "시녀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다만 애트우드의 두 작품은 소설인데, "배움의 발견"은 소설이 아니라 저자 본인의 삶을 되돌아보며 쓴 논픽션 비망록이라는 점이 가장 큰 차이겠죠.
뉴욕타임스에 웨스트오버가 쓴 칼럼을 옮깁니다.
대학교 1학년 첫 학기 때를 떠올리면, 그 기억은 지금도 온몸에 생생히 되살아난다. 나는 늘 극도로 피곤했다. 매일 아침 3시 40분이면 알람 시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린다. 그 소리는 지금도 내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이어 칠흑같이 어두운 방 안에 어색하게 걸터앉은 듯한 시계 속 주황색 숫자 3:40, 잠이 덜 깬 채 본능적으로 알람 버튼을 끄는 내 손, 지친 몸을 이끌고 침대에서 빠져나와 곧장 문으로 향하는 내 모습이 보인다. 잘 때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입고 문을 나선다. 전날 밤 잠들 때 나갈 옷을 미리 입고 잠들기 때문이다. 덕분에 3시 반이 아니라 3시 40분까지 10분 더 잘 수 있었다.
로키산맥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나는 공과대학 건물로 향한다. 새벽 경비 및 청소 일을 했다. 아침 4시부터 건물 안의 작은 나일론 카펫에 붙은 껌을 떼어내거나 칠판에 써 있는 복잡한 수식들을 지우고, 화장실 변기를 청소하는 게 내 일이었다. 일을 다 마치고 나면 아침 8시쯤 됐다. 그때 나는 수업을 들으러 갔다.
대학교 신입생 첫 두 달간 나의 일과는 늘 이렇게 시작됐다. 그러나 새벽에 경비 일만 해서는 집세를 낼 수 없었다. 그래서 두 번째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학교 구내식당에서 코울슬로와 젤리를 서빙하는 일이었다. 같이 일했던 동료도 나처럼 1학년 학생이었는데,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 식대를 내지 못해서 일을 했다. 우리 둘은 지금 우리가 주문받고 파는 음식을 정작 우리는 사 먹을 돈이 없다는 씁쓸한 사실을 서로 입에 올리지 않았다. 나는 일하다 주어지는 점심시간에 앞치마를 걸어두고 가방 속에서 미리 싸 온 점심을 꺼내먹었다. 단백질 바 하나랑 동네 슈퍼에서 개당 10센트(약 100원)에 살 수 있는 라면이었다. 매일 같은 메뉴였지만, 그렇다고 질리거나 화가 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와 같은 학년 학생들, 내 친구들이 먹은 음식이 담은 접시를 씻고, 사용한 화장실을 청소한다고 해서 딱히 창피하거나 모멸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가난, 불평등에 관해서 무언가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긴 했지만, 기억에 남는 결론은 늘 같았다. 그 냥 너무 피곤했을 뿐이다.
난생처음 간 학교에 대한 기억과 다른 경험을 모아 나는 2018년에 비망록 "배움의 발견"을 펴냈다. 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됐을 때 나는 적이 놀랐다. 내가 살아온 길지 않은 인생은 분명 대단히 희귀한, 극단적인 사례에 속한다. 나는 아이다호주의 산골짜기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독실한 몰몬 교도셨는데, 정부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출생 신고도 아홉 살이 됐을 때 뒤늦게 했다. 브리검영 대학 강의실이 내겐 태어나 처음 듣는 학교 수업이었다. 나는 2008년에 학부를 졸업하고, 장학생으로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공부했으며, 거기서 박사까지 받았다.
내 삶의 기록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나니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책을 읽고서는 내 이야기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피드백을 주는 거다. 출판 기념회나 북토크를 가면 내 책을 읽고 희망을 얻었다는 사람도 있고,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굳세게 다시 일어서는 내 모습에 감명받았다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이 그렇게 봐준다니,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가끔, 아니 종종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나로선 딱히 어떻게 답해야 좋을지 모를 말을 듣곤 하는데, 이런 식의 찬사다.
당신은 아메리칸드림의 산증인이에요. 누구나 꿈꾸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셨잖아요.
정말 그런가? 내가 풀어낸 이야기는 아메리칸드림의 전형이나 단면이라고 할 수 있나?
늘 피곤했던 기억을 제외하면, 내 대학 생활을 관통하는 경험은 가난이었다. 나는 무척 가난했던 학생이었기에 늘 한없이 부족했던 돈과 자원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을 뽑아내려 했다. 학점은 당연히 꽉꽉 채워서 들었다. 다음 학기 등록금을 낼 수 있을지 늘 걱정하며 지냈으니, 비싼 돈 주고 다니는 학교에서 수업을 여유롭게 듣는 사치를 부릴 수는 없었다. 아르바이트도 한 개로는 부족했기에 두 번째 아르바이트도 해야 했고, 야간이든 새벽이든 시급이 높은 시간대가 있으면 무조건 그 시간을 골랐다. 잔디 깎기는 물론이고, 낙엽이든 눈이든 계절 따라 적은 돈이라도 받고 치워야 할 게 생기면 무조건 치웠다. 얼마를 주는지 묻지도 않았다. 아르바이트할 때마다 했던 질문은 딱 하나, 돈을 언제 받을 수 있는지 뿐이었다.
신입생 때 내 삶을 지배한 건 돈이었다. 부족한 돈을 메울 궁리 외에 다른 생각을 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매일 아침 3시 40분에 일어나야 했던 것도 밤 근무는 시급이 6.35달러로 낮 근무보다 1달러 더 비쌌기 때문이다. 자정까지 음악을 크게 틀어놓는 룸메이트 덕분에 하루에 3시간 정도밖에 잠을 못 자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잠이 부족하니 강의 시간엔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지만, 상관없었다. 겨우내 잔기침을 달고 살았고 코는 축농증으로 늘 막혔지만, 그래도 내 선택을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1달러나 더 주는데 그걸 왜 마다하겠는가!
내 대학 생활은 2학년 때 순식간에 끝장날 뻔했다. 어느 날 턱이 너무 아파서 치과에 갔더니, 의사는 이가 썩어 신경까지 건드리게 됐다며 당장 신경 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다. 문제는 치료비였다. 1,600달러가 든다고 했다. 그렇게 큰돈을 구할 길도 막막했지만, 학교는 당장 그만두는 수밖에 없었다. 오빠 한 명이 라스베가스에서 장거리 트럭 운전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오빠가 거처로 사용하는 트레일러에서 몇 달 정도 지내면서 길 건너 버거 가게에서 일하며 돈을 모아볼 생각이었다.
내가 다닌 학교는 브리검영 대학교였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 학생이 몰몬교 신자였다. 학교엔 종교적인 고민을 포함해 대학 생활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를 상담해주는 비숍(성직자)이 있었다. 비숍은 내게 펠 그랜트(Pell Grant)라는 연방정부 장학금을 알려줬다. 나처럼 가난한 학생들에게 학자금과 생활비를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처음엔 뭔지 몰라 두려움에 완강히 거부했지만, 끝내 비숍은 나를 설득했고, 며칠 뒤 4천 달러가 적힌 수표가 내 앞으로 도착했다. 생전 본 적도 없는 큰돈이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서 일주일 동안 수표를 그냥 뒀다. 그렇게 많은 돈을 소유하게 되면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러다 잠깐 괜찮아진 줄 알았던 치통이 다시 도졌다. 너무 아파서 어쩔 수 없이 은행에 가서 4천 달러를 현금으로 바꿨다. 바로 신경 치료를 받았고, 등록금도 낼 수 있었다. 입학한 뒤 처음으로 수업 시간에 필요한 교과서도 샀다. 그렇게 하고도 1천 달러 넘는 돈이 남았다. 그래서 학교 구내식당 아르바이트는 그만뒀고, 공과대학 청소 일도 밤 근무 대신 낮 근무로 바꿨다. 더는 수업 시간에 졸지 않았다. 기침은 멎었고, 축농증도 이내 나았다.
정부에서 받은 장학금 4천 달러를 현금으로 바꾼 그날은 내가 비로소 진짜 학생이 된 날이기도 하다. 장학금 덕분에 나는 수중에 있는 돈으로 앞으로 몇 일을 버틸 수 있을지 걱정하지 않게 됐고, 처음으로 강의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4천 달러는 부자가 되기엔 부족한 액수였지만, 당시 내게 무엇보다 필요했던 안정을 주기엔 충분한 돈이었다. 생활이 안정되고 나니, 그제야 대학생이자 성인으로서 나는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 스스로 묻게 됐다. 내가 뭘 하거나 생각할 때 좋았는지, 내가 무얼 잘했는지 찬찬히, 진중하게 찾아볼 수 있었다. 교과서나 필독서 외에 다른 책을 볼 여유가 생겼고, 필수 과목이 아닌 수업 중에도 그저 재미있어 보여서, 궁금해서 들어보는 수업이 생겼다.
그 순간부터 내가 내린 모든 결정은 장학금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다. 1달러를 더 벌려고 하루 수면 시간을 몇 시간씩 줄였던 시절에 수천 달러는 내 인생을 통째로 바꿔놓았다. 새로운 우주가 열린 것과 같았다. 돈으로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귀중한 일이 무엇인지 그때 절실히 깨달았다. 돈이 있어야 돈과 상관없는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와 능력이 생겼다. 돈에 얽매이지 않게 되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내 이야기를 하고 싶은 유혹이 들 때도 있다. 나라고 영웅이 되고 싶지 않을까? 굳게 결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험난한 여정을 열심히 헤쳐 왔더니 지금에 이르렀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더 열광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이야기의 중심은 사실 내가 아니다. 그보다는 나를 둘러쌌던 조건과 환경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2004년에 브리검영 대학교에 들어갔다. 브리검영 대학은 몰몬교 교회가 상당한 금액을 지원하기 때문에 사립대학이지만, 한 학기 등록금이 1,640달러로 매우 쌌다. 2008년 부실 부동산 담보 채권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오기 전이었다. 그래서 나는 룸메이트가 있는 낡은 아파트를 월세 190달러에 얻을 수 있었다. 18년 전 나는 어쨌든, 일과 학업을 병행할 수 있었다. 무척 힘들고 피곤했지만, 애초에 엄두도 못 낼 정도는 아니었다.
여름방학 때 아이다호 집에 오면 읍내 슈퍼마켓에서 장 본 물건을 담아주는 일을 했다. 시급 5.35달러를 받고 일했다. 1년 학비와 생활비가 3천 달러 정도 들던 시절이다. 그 돈을 벌려고 여름 내내 "종이 가방, 비닐봉지 중 어디에 담아드릴까요?" 이 말을 수천 번 해야 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하면 학기 중엔 학교로 돌아가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정부를 믿지 않아 공교육도 믿지 못한 부모님은 나를 학교에 보낸 적이 없다. 대학교는 내 의지로 갔으니, 학비나 생활비를 보태줄 거라고는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돈도 돈이지만, 학교라는 공간에서 같이 수업을 듣고 방과 후에 같이 공부하고 과제를 하는 생활 자체도 한없이 낯선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간절히 원하는 일이라면 해볼 여지가 얼마든지 있던 시절이다.
오늘날이라면 18년 전의 나는 절대 나올 수 없었다. 가난한 집안 출신 학생은 내가 받은 교육을 받을 수 없다. 트럭 운전사, 농부, 청소 노동자, 택시 기사들은 미국에서 아마 가장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이 자녀에게 대학 교육을 시키기는 너무 어려워졌다. 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미국 4년제 대학교 등록금은 물가 인상을 반영한 뒤에도 30년 전보다 두 배 이상 비싸졌다. 2019년 고등교육정책 진흥기관이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미국의 평균적인 주립대학에 다니려면 저소득층 집안 출신 학생들은 8만 달러 정도를 빚을 내야 한다. 미국에서 가장 학비가 싼 축에 속하는 브리검영 대학교도 내가 졸업한 뒤 등록금이 두 배 이상 올랐다.
펠 그랜트 장학금은 내게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상태가 어떤 것인지 생생히 알려준 소중한 첫 경험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등록금도, 집값도 너무 올라서 펠 그랜트 장학금만 받아선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다. 50년 전 처음 장학금 제도가 마련됐을 때만 해도 펠 그랜트 장학금은 4년제 대학에 다니는 데 드는 비용의 79%를 지원했다. 오늘날 그 비중은 29%로 낮아졌다. 여전히 훌륭한 제도지만, 경제적 안정을 가져다주기엔 너무 부족한 금액이 돼버린 거다. 그래서 내가 장학금 덕분에 누릴 수 있었던 경제적 안정, 마음의 평안, 그 전엔 사치로 여겨지던 삶의 진로에 관한 고민이 모두 이제는 불가능해졌다.
오늘날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우리는 아무런 희망도 주지 못하고 있다. 교육만이 희망이라고, 대학교 학위만 있으면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다고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그 말에 책임질 자신이 없다. 오늘날 가족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 대학 교육을 받으라는 건 결국 엄청난 빚더미에 앉으라는 소리일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교육을 받고 난 뒤에 과연 얼마나 안정적인 직업을 구해서 돈을 벌 수 있을지, 어마어마한 학자금은 언제 갚을 수 있을지는 갈수록 불확실해지고 있다. 그 사실을 조언하는 우리도, 듣는 학생들도 이미 다 안다. 그들에게 아메리칸드림은 허울 좋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래서 내 책은 아메리칸드림의 생생한 증거라기보다 아메리칸드림이 얼마나 신기루에 가까워졌는지를 극명히 보여주는 씁쓸한 방증일지도 모른다.
아메리칸 드림을 들먹이면서 눈물을 글썽이며 호레이쇼 엘저풍의 자수성가형 성공담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 삶이 말이 되기를 바랐고, 그런 류의 이야기는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배움의 발견" 중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 해결책은 여러 가지가 있다. 공교육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고 교육을 이윤을 창출하는 도구가 아니라 철저히 공공재로 취급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펠 그랜트 같은 정부 장학금을 늘리고, 학자금 제도도 개선해야 한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최근 들어 우리 사회와 정치를 모두 병들게 한 거대한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혜를 모으고 행동에 나서야 한다.
나부터 할 일을 하려 한다. 우선 내 이야기를 틀에 박힌 영웅담으로 윤색하지 않을 거다. 그런 이야기의 문제는 성공의 비결을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나 끈기처럼 개인의 문제로 국한하는 데 있다. 외부적인 요인도 똑같이, 어쩌면 더 중요한데, 늘 이를 간과한다. 그래서 나는 우선 솔직히 인정하려 한다. 내가 대학생일 때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기회가 주어진 걸 보면 분명 좋은 시절이었다고 말이다. 어쩌면 "배움의 발견"은 내가 배움에 눈을 뜰 수 있게 해준 환경에 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펠 그랜트 장학금을 손에 쥐었을 때 절실히 깨달은 바가 하나 있다. 사람은 넘어지고 무너졌을 때 늘 굳세게 일어날 수 없지만, 국가라면 언제나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