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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메리카노 Feb 04. 2022

입춘(立春) 인 뉴욕

칼럼 하나 소개하기까지 늘어지는 빌드업

봄비 내리는 포근한 목요일 오후다. 

음력설이었던 지난 화요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임인년 새해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호랑이 이미지를 띄웠다. 얼마 전 아시아계 여성이 선로에 떠밀려 추락해 숨지는 혐오범죄가 일어난 타임스퀘어와 불과 몇 블록 거리에서 주로 아시아 – 정확히 말하면 중국 문화권 – 사람들만 챙기는 음력설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는 게 어딘가 착잡했지만, 뉴욕이란 도시는 늘 그렇다. 어떻게 보면 비정하기도 하고, 그냥 무던히 흘러가는 그런 곳이다.

설날 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사진=The Verge

호랑이가 설날 마천루를 수놓았다고 해도 그뿐이지 설을 공휴일로 지정해준 건 아니었으므로, 우리 부부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바쁜 한 주를 보내는 중이다. 명절 맞아 한데 모인 한국의 가족들과 영상통화를 하며 비대면 세배를 한 것 정도를 제외하면 나는 번역하고 글 쓰고, 아내는 가르치고 연구하느라 바쁜 사이 2월이 왔다. 


내게 뉴욕의 겨울 날씨는 매섭진 않지만, 꽤 끈질긴 녀석으로 기억돼 있다. 12월까지는 기온이 좀처럼 영하로 내려가지 않고 포근하다. 대신 3월 말까지도 좀처럼 날이 풀리지 않는, 봄에게 좀처럼 자리를 내주지 않아서 끈질기달까. 이제 좀 봄이 오나 싶으면 함박눈이 내리는 날이 꼭 몇 번씩 있었다. 꽃샘추위와는 결이 또 다른 추위다.

그런데 오늘은 최고 기온이 무려 47도였다! 47도? 가만있어 보자…  화씨로 표시한 기온은 아직 곧바로 와닿지 않는다. 섭씨로 바꾸는 데 걸리는 버퍼링 타임은 설날 떡국을 먹고 연륜을 쌓은 대신 굳어지는 두뇌 회전수만큼 길어진다. 아, 섭씨로 8도 정도 되는 것 같다. 정말 포근하구나. 종일 내리는 비에 주말에 와 쌓인 눈도 녹아서 거의 다 씻겨 내려갔다.


2월치곤 이례적으로 포근한 날이구나 생각했는데, 한국에서 가져온 달력에 적힌 절기를 보니 내일(4일)이 입춘이다. 아하! 그래서 뉴욕에도 봄을 알리는 비가 내리는 걸까?

물론 말도 안 되는 억지다. 24절기는 쌀을 주식으로 하는 한반도에서 벼농사 위주로 한 해 농사를 짓는 데 최적화해서 짠 시간표인데, 그게 여기서 들어맞을 리가 없지 않은가. 전에도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진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맞아, 이번에 뉴욕 돌아온 날도 대한(大寒) 다음날인가 그랬는데, 정말 추웠잖아! 아냐, 그건 선택 편향일 거다. 우연히 24절기와 뉴욕 날씨가 맞아떨어졌을 뿐이다. 한국에서 쓰던 통신사 전화나 1만 원 지폐가 여기선 통용되지 않는 것처럼 24절기도 통할 리가 없다. 이곳은 지구 반대편, 이역만리 남의 나라니까. 날씨 예보를 보니 역시 주말엔 다시 기온이 영하 10도까지 내려간다. 그럼 그렇지. 봄을 딱히 기다리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오늘 내리는 비는 봄비라고 부르련다. 


봄비치곤 제법 많이 내리는 입춘 전날, 얼마 전 뉴욕타임스 데일리 팟캐스트를 듣고 다짐한 바를 실천에 옮겼다.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을 좀 내려놓고, 카페에 와서 글을 쓰기로 한 것이다. 오미크론 변이는 부스터샷 맞았으면 설사 걸리더라도 많이 아프지 않다고 하니, 일상을 회복하는 데 나도 동참해야 하지 않을까? 마침 비가 오는 날은 비말이 덜 퍼진다는 말을 들었던 것도 같고…

오미크론 변이가 우세종이 된 뒤 처음으로 카페에 갔다.

“Is that for here or to go?”

여기서 마시고 갈 거라고 했더니, 백신 맞은 증명서를 보여달라고 한다. 뉴욕은 코로나19 백신을 맞은 이력을 보여줘야만 카페나 식당 등 실내 공간을 이용할 수 있다는 규정을 실제로 지키는 매우 드문 도시다. 팬데믹이 한창이던 때 보스턴, 시애틀, 워싱턴 D.C.에 갔는데, 백신 접종 증명서 보여달란 말은 한 번도 못 들었다. 산호세(실리콘 밸리) 사는 친구 말로는 거기는 뉴욕처럼 백신 접종 이력 실제로 확인한다고 했다. 

아무튼 한국처럼 QR 코드를 찍으면 백신 접종 이력이 뜨는 시스템은 없다. 아마 미국 정부의 일처리 능력을 고려하면 열이면 백 심각한 버그가 나지 않을 리가 없고, 무엇보다 미국 사람들이 민감한 개인정보를 빅브라더가 모으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거다. 정부는 안 되지만 구글이나 아마존, 페이스북은 해도 괜찮은 것 투성이니, 그럼 구글이 하면 안 되나 싶지만, 빅테크 기업이 돈도 안 되고 욕먹기 딱 좋은 일을 굳이 할 것 같지도 않다. 


서론이 쓸데없이 길었다. 나는 언제부터 이런 걸까? 나 자신에 대한 기억이 나는 순간부터 돌이켜보면, 무언가를 간명하게 추려 요점만 깔끔하게 말한 내 모습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늘 두서없이 이말 저말 참 할 말이 많은 편이었다. 아내와 함께 녹음하는 팟캐스트도 2시간을 녹음하면 1시간 반 정도 방송 분량이 나오는데, 편집하면서 잘라내는 30분 분량 가운데 내가 중언부언 떠드는 부분이 언제나 27분 정도다. 2분은 편집을 위해 남겨둔 여백이고, 아내는 쓸데없는 말을 하면 벌금이라도 내기로 한 사람처럼 딱 할 말만 한다. 

지금도 또 옆길로 새고 있다. 상선약수. 참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딴소리를 한다. 이제 진짜 그만. 

아무튼 그리하여 오늘은 마침내 집을 나와 카페에 앉았고, 여기서부터가 본론이다. 


원래 쓰려던 글은 어제 뉴욕타임스에서 읽은 아주 인상적인 칼럼에 관한 글이었다. ‘미국을 알아가는 시간’이란 모토에도 꼭 들어맞는 칼럼은 베스트셀러 “배움의 발견(Educated)”의 저자 타라 웨스트오버(Tara Westover)가 쓴 칼럼이다. 

“배움의 발견”은 지난 아메리카노2020 첫 시즌 에필로그에서도 소개했던 책이다. 나 말고 아메리카노2020을 함께한 두 명이 모두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꼽은 책이었다. 나도 읽어보려고 한국어로 번역된 책을 샀었는데, 아직 못 읽었고 심지어 한국에 그 책을 두고 왔다.

어젯밤 칼럼을 소개하기 전에 책을 조금이라도 읽어보려고 집 책장에 꽂혀 있던 영어 원서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역시 영어 책은 읽고 있노라면 내가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책이 나를 집어삼키려고 자꾸 달려드는 통에 그저 책의 활자들을 노려보고만 있게 된다. 답답한 대치 속에 길어야 세 쪽을 넘기지 못하고 책을 덮는다. 

이래선 안 되겠다, 책 잘 안 읽는 내가 책을 읽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딱 하나. 전자책으로 번역본을 다시 주문하는 거다. 평소에 1센트 단위로 가계부를 쓰며 지출 내역에서 숫자가 하나라도 맞지 않으면 잠을 못 이루는 나다. 그래서 '내돈내산' 책은 반드시 다 읽어야 한다. 좋게 말하면 근검절약이 몸에 밴 내 성미 덕분에, 더 솔직하게 말하면 소탐대실의 표본과도 같은 내 구두쇠 기질 때문에 “배움의 발견”은 베스트셀러가 된 지 3년이 지나 마침내 2022년 나의 필독서 목록에 올랐다. 일부러 할인 쿠폰도 쓰지 않았다. 비싸게 주고 산 책이어야 더 열심히 읽을 것 같아서…

그런데 읽기 시작하니 굳이 장치를 마련해두지 않았더라도 책장이 금방금방 넘어갔다. 친구들의 표현을 빌리면 “결코 유쾌하지는 않은 독서”이고, “온몸의 마디마디가 저릿저릿 아파오는 책”이기도 하다. 미국의 평범한, 평균적인 삶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저자의 회고록 중에는 끔찍하다고밖에는 표현하기 어려운 사건에 대한 묘사도 있고, 벌써부터 괴로운 장면도 있었다. 분명한 건 앞부분만 읽었는데도 흡입력이 상당한 이야기라는 점. 저자는 실로 기구한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 사람인 동시에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그래서 칼럼도 이토록 생생하면서도 울림이 있었던 것 같다.

 

이제 본격적으로 칼럼을 번역해 소개하려 했는데, 아차, 여기 카페는 와이파이가 안 된다고 한다. 휴대폰 요금제를 잘못 정한 건지 개인용 핫스팟으로 인터넷을 쓰려면 요금을 더 내야 한다. 지금 내는 요금도 한국보다 두 배 가까이 내는데 서비스는 2000년대 수준이면서 돈을 더 내라니. 역시 미국 통신사는 뻔뻔한 날강도다.

오늘은 이렇게 서론만 쓰고 글을 황급히 마무리한다. 소개하고 싶던 본론에 해당하는 타라 웨스트오버의 칼럼은 링크만 남겨두고 번역은 다음에 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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