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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스 Feb 14. 2016

분노 다루기

분노의 감정에서 평화로운 감정으로 어떻게 전환이 일어나는걸까? 

  분노는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기 위한 전투다.                    

분노는 감정의 불꽃이다. 분노가 생겨나면 이것은 우리 속에서 지글지글 끓고, 타오르고, 폭발한다. 그것은 매우 치열하고  강렬하고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한다.  분노는 불꽃처럼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서 대상에게로 분노를 옮기거나 촉발한다. 그렇게 분노는 나무에서 나무로 불꽃이 옮겨지듯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옮겨 붙으며 커져간다.   


분노는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기 위한 전투다.  분노는 자기 존재를 구하기 위한 전투인 것이다.  '나 좀 봐, 나 여기 있어' 크든 작든 이게 분노가 외치는 소리다.   


우리는 성장하면서 대상을 자기와 동일시하게 된다. 그 동일시 속에서 자신을 구축하고 만들고 키워나간다. 이것이 정체감이다. 그런데 살면서 필연적으로 이 정체감을 소외나 배재, 공격이나 혼란, 박탈감이나 열등감 등을 통해 잃거나 빼앗겼다는 느낌이 무의식에 잠재된다. 의식 속에서는 자신이(자신의 입지와 영역) 점점 작아지고 있다고 느끼며  무시당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런 생각과 느낌이 내면에 쌓이면 분노가 되고 분노로서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외적으로 분출되지 못하는 분노는 자기 자신을 공격하여 자신을 무기력에 빠트린다. 그러나 외부로 분출하는 분노는 자기 자신과 타인을 동시에 고통에 빠트린다. 분노는 무기력에서 자신을 구하는 좋은 수단이다. 활활 타오르는 분노는 무기력한 상태에서 일어나도록 만든다. 또한 개인 간에 끊임없이 침해당하던 자기 영역의 경계를 제대로 세우게 하는데도 일조한다. 

 현재'와의 전투가 되어 버린 분노


그러나 본질적으로 분노라는 전투는 두려움에 바탕하여 나오는 행위이다. 그리하여 만약 이 분노라는 전투가 빈번하게 지속적으로 계속되면 그만큼 평화를 잃게 되고 대신 그 자리에 두려움과 불안과 혼란 그리고 자아도취 같은 것들이 들어서게 된다. 그리하여 분노는 결국 자기 통제를 벗어나게 된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부터 이 전투는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현재'와의 전투가 되어 버린다.


분노가 현재와의 전투가 되어 버리면 두려움으로 인하여 자신 안에 있는 기준'~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혹은 '~해야만 한다'와 어긋나는 모든 것에 화를 내게 된다. 그것대로 되지 않으면 뭔가 크게 잘못될 것 같은 불안에 사로잡힌다. 또 자신이 옳다거나 그르다고 여기는 모든 잣대에 어긋나는 것과 또한 전투를 벌인다. 그리하여 자신과 가족들 혹은 주변 사람들 속에서 삶을 계속해 나갈 에너지를 뺏고 함께 고통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때가 되면 그는 스스로 분노를 통제하거나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분노는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여 분노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분노는 빠르기와 순간적 효과 측면에서 분노하는 그 자신을 중독시킨다. 그는 점점 인내와 통찰 그리고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잃어간다. 그렇게 분노에 빠져들게 되면서 그는 자기 자신을 분노에서 찾게 된다. 분노할 때 살아있음을 느끼고 분노할 때 자신이 커지고 존중받는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비열한 에너지 강탈일 뿐이다. 그는 분노를 통해 주변 사람들의 에너지를 강탈하고 그들의 삶을 절름발이로 만들거나 불구로 만들어 세상으로 나가기 힘겹게 만든다. 


분노는 학습된 감정 반응일 뿐이다. 


그러나 분노는 본능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다만 학습된 것이다. 분노란 성장하면서 감정 반응을 배운 것뿐이다. 우리는 감정 반응 또한 배워서 가지게 된다. 어릴 때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일과 그들의 표정 그리고 언어와 행동을 보면서 '이런 일에는 이렇게 반응하는 것'을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으로 학습한 것이다. 수많은 감정들이 이렇게 집단의 압력에 의해 그리고 인생 선배들에 의해 학습된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순간부터 내면에 자리 잡으면서 자동반응이 되었고 그것은 본래부터 우리 안에 있었던 본능과 같은 것 처럼된 것이다. 그것은 그저 우리의 일부로  동일시된  것뿐이지만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니다.   


분노 다루기, 먼저 목소리 듣기 


분노에서 벗어날 의지가 있다면 얼마든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스스로 분노를 다루고 분노에서 벗어나 완전히 편안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올바른 방법을 안다면 어려운 게 아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시간을 다를 것이다.   


화가 난다면 우선 자신이  어떨 때 화가 나는지를 노트에 쓰거나 말을 함으로써 화를 내는 자신의 패턴을 인식한다. 화가 날 때 화를 내는 그 뒤에 숨어서 소리치는 분노의 소리를 듣는다. 때로 그것은   '나 좀 봐, 나 여기 있어' 이거나 '나를 내버려 두란 말이야' 혹은 '내 말을 들어야 해'라든지 '그것은 잘못된 거야' 등등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어찌 되었든 그 소리를 찾아 기록해 둔다. 자신의 소리는 자신만 들을 수 있다. 그 소리가 어떤 소리이든지 그것은 '~하지 않으면  안 돼' 이거나 '~해야만 해' 이거나에 해당할 것이다. 이것에 해당된다면 '이 세상에 반드시 ~해야 하거나 혹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란 없다는 것을 자신에게 설득시켜야 한다. 그리고 상대방은 상대방의 생각대로 말하고 행동할 권리가 있고 그것이 존중되어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분노 다루기, 알아차리고 설득하기 


상대방이 내 생각과 내 뜻대로 말하고 생각하고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매우 독재적 폭력임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자주 보는 사람 또한 자신과 '동일시'하여 자신과 같이 생각하고 자신과 같이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상대방이 다르게 생각하고 말할 때 틀렸다고 규정하고 그것을 비난하고 고치려 든다. 심할 때는 상대방이 자신을 무시한다고까지 생각하게 된다. 사실 이것은 인지 혼란이다.)


또 다른 인지 혼란 중에는 나는 맞고 상대는 틀린다는 규정이 있다. 만약 자신이 이렇게 '틀림없이 자기가 옳고  상대는 틀렸다'라는 전제 위에 화를 내고  있다면 '그것이 사실인가?' '그것이 사실인지 어떻게  아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것 역시 인지 혼란 중에 하나이기에 이치적으로 따지면 그것은 사실일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그 또한 사실이 아니라고 알아차리고 설득해야 한다.  


분노가 아닌 분노 뒤에 숨어서 소리치는 그것(내 마음)에게 이렇게 묻는다. 

 '너는 무엇을 하려고 하니?' 하고 물어라. 그리고 대답을  기다려라. 어떤 대답이 나오든 상대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상대에게 뭔가를 알려주고  싶어서'라든가 '뭔가를 바꾸거나 개선하고 싶어서'라든가 '더 잘되고 더 평화롭기 위해서' 혹은 '나 자신을 지키거나 보호하기 위해서' 혹은 '~가 두려워서' 일 것이다. 


만약 대답이 '~가 두려워서' 이면 그 두려움을 살펴준다. 그리고 그 두려움 또한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실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에 기반한  기억'일뿐이거나 '자신의 부정적인 예측'에서 일어나는 것일 뿐 사실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설득한다.    


 그리고 또 어떻게 해줄까?'를 묻는다. 만약 너무너무 화가 나서 뭔가 분노를 표출하는 화풀이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대답이 들려오면 분노 풀이를 한다. 이때 분노 풀이의 대상이 사람이 되면  안 된다. 사람이 없는 장소로 가서 물건이나 대상을 분이 풀릴 때까지 때리고 화를 내고 소리를 질러도 괜찮다. 누구나 반드시 이과정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또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은 이렇게 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현실에 항복하기 

그리고 다시 묻는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은 무엇인가?'

분노가 일어나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바꾸거나 변화시킬 수 없는 절대적인 현실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버스를 기다리는데 버스가 오지 않아서 화가 난다. 이때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 누가 와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현실은 아직까지 '버스가 오지 않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은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설사 신이라고 해도 바꾸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절대적인 현실에 저항하고 싸우고 전투를 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만 다치게 되는 것이며 백전백패가 불을 보듯 명확한 일이다. 이것에 저항하면 할수록 문제는 계속되고 고통이 커진다. 이것과 싸움을 하면 할수록 본인은 에너지를 잃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이 원하는 게 분노로 인한 고통을 끝내는 것에 동의한다면 저항과 싸움을 멈추어야만 한다. 그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음을 알아차리고 자기 설득을 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에 저항을 멈추고 싸우지 않는다면  그다음에는 두 가지 방법이 남이 있다.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현실'를 수용하기 혹은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현실'에 항복하기다. 


가능하면 완전히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현실에 항복하기를 권한다. 이때 분노와 전투로 끊어졌던 어떤 에너지의 흐름이 이어지게 된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최상의 자세는 이것이다. 나는 내 목표 혹은 내 소망대로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그 나머지는 흐름에 맡기기' 는것이다. 나는 전부를 알 수 없다. 나는 모른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나머지는 맡긴다.라는 마음자세인 것이다. 이것은 삶의 흐름을 끊지 않고 지속해서 흐르게 하기 때문에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때가 되면 우리가 원하는 곳에 닿게 한다. 


우리가 두려움과 불안 분노 같은 것으로 삶의 흐름을 끊거나 막고 나설 때 삶은 변하지 않고 아주 오래도록 같은 자리에 머문다. 그런 사람들에게 삶은 변하지 않는 것이며 지루한 것이고 무의미하고 재미없고 고통스러운 것이 된다. 이렇게 현재에 대한 완전한 항복과 수용으로 흐름이 다시 이어질 때 현실이 전환된다. 고통의 현실에서 편안한 현실로 에너지를 잃던 현실에서 에너지를 보존하는 현실로 어리석은 나에서 지혜로운 나로 전환이 일어난다.


분노에서 평화로 어떻게 전환이 일어나는 걸까?


며칠 전 있었던 일이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서울에서 내가 고대하고 있던 강연이 저녁 5시경에 있다는 것을 막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다음날부터 시작될 2박 3일간의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어떤 캠프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 캠프를 위해 오늘 컨디션 조절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서울에서 저녁에 열리는 그 강연도 내가 기다리고 있던 강연이었다. 나는 남편에게 5시 강연을 위해 서울에 데려다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남편은 흔쾌히 그러마고 했다. 넉넉하게 도착하기 위해 오후 2시경 출발을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12경 점심을 먹고 갑자기 컨디션이 엉망이 되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프고 편두통이 머릿속을 휘젓고 돌아다니고 몸은 갑자기 천근만근이나 된 듯이 무거웠다. 출혈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탓이었다. 그래도 일단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화성휴게소에 들릴 때까지 도로 사정은 괜찮았다. 목요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성휴게소를  나오면서부터 차가 막히기 시작했다. 장난이 아니었다. 남편은 이전에도 서해고속도로가 막히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 좀 더 일찍 출발하자고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원망이나 짜증을 내지 말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실에 완전하게 항복하기로 마음먹었다. 


강연에 늦을 것 같았다. 제발 길이 뚫리기를 기도했다. 남편은 어떻게 해서든 차를 좀 더 빨리 몰려고 했다. 나는 서둘지 말자고 했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대로 수용하겠다고 했다. 차는 막히고 느렸지만 남편은 최선을 다해 빠른 길로 운전을 했고 우리 두 사람의 마음은 평온했다. 결국 도로에서 2시간을 더 보내게 되어 6시에 강연장에 도착했다. 강연이 끝나고 사람들이 막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내려서 사무실에 가서 확인해 보니 역시 강연이 끝났다고 했다. 


조금의 원망이나  불평불만 없이 우리는 다시 돌아온 길을 되돌아 달렸다. 평소에는 2시간 거리는 곳이었다. 내려오는 차 안에서 마음이 더할 수 없이 평온했다. 나는 잠시 강연에 대해 생각하며 다음 강연이 언제 있을지 몰라도 참석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강연에 참석하지 못했어도 감사하다'는 느낌이 배속에서 밀려 올라왔다. 그리고 온전히 보호받고 사랑받는 느낌이 우리를 감싸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행복감이 우리 두 사람을 감싸며 점점 커져갔다. 우리는 마치 처음 만나 연애하는 연인처럼 헤어지기가 아쉬워 이 도로가 끝없이 계속되어 헤어지기 않고 계속해서 달려갔으면 하는 그런 기분에 휩싸였다. 창밖을 지나가는 가로등과 눈앞에 펼쳐지는 도로의 풍경들이 모두 너무 생생했다. 우리가 탄 차가 달리다가 그대로 사뿐하게 날아오를 것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어떻게 화를 내고 짜증을 내며 살아왔을까? 나는 마치 꿈에서 깨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충만한 행복 감속에서 집에 도착했다. 쉬고나서 다음날 일정을 소화하는데 몸은 오히려 상쾌하게 회복되어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현실에 완전히 항복했을 때' 이렇게 현실이 전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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