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심장의 한쪽 공간을 내어주는 일
사랑, 특히 첫사랑은 더욱 아프다. 사랑은 우리에게 심장이 있다는 것을 마치 처음으로 상기시키라도 하듯 그렇게 심장과 마음에 예리한 통증을 일으키고 깊은 상처를 남긴다.
사랑을 하면 우리 마음은 처음으로 자신을 떠난다. 그때까지 공들여 키워오고 가꿔오고 적응해왔던 자신을 떠나서 새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심장에 깃들고 싶어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기꺼이 자신의 심장의 한쪽 공간을 내어주면 사랑이 시작된다. 그렇다. 진실로 사랑은 자신의 공간을 내어 주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라기 보단 본능적 유희에 가까운 것이다.
진실한 사랑은 서로의 마음을 서로의 심장에 깃들인 채 함께 살아간다. 그러나 상대가 내게 자신의 공간을 내어주지 않으면 짝사랑으로 끝나게 된다. 짝 사랑, 이루지 못한 사랑은 깊은 사랑의 고통과 상처를 남긴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해 왔으면서도 어찌 된 일인지 기꺼이 내 마음이 깃들 심장의 한 공간을 내어준 그가 내 심장의 한 공간에 깃들지 않는다. 어느 순간 자신이 홀로 외사랑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상대는 오직 사랑을 받으려 하거나 혹은 사랑을 받는데 익숙해져 있을 뿐 사랑을 주려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사랑의 아픔이 여기서 시작된다. 사랑을 받기만 하고 줄줄 모르는 사람과 사랑을 하는 것 말이다. 우리는 모두 사랑받고 싶어서 사랑을 한다. 사랑을 하는데 사랑이 되 돌아오지 않으면 점점 사랑에 목마르게 된다.
그런데 상대방은 사랑을 주는 일에는 도무지 DNA가 없는 듯 말을 하고 행동을 한다. 때로는 전혀 인연조차 없던 사람처럼 무심하고 때로는 아주 먼 곳을 바라본다. 서서히 상처를 받기 시작하고 사랑의 확신을 잃고 혼란을 느끼다가 서운한 감정을 표현한다. 그리고 사랑의 쟁투가 일어난다.
행복한가? 그러면 사랑할 준비가 된 것이다.
사랑은 이성을 마비시킨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기 전에 '나는 사랑할 준비가 되었나?' 하고 한 번 생각해 보지 못한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 생각 이전에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하나?'라는 생각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받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감각의 촉수가 '저 사람이 나에게 사랑을 줄 것인가? 저 사람을 사랑하면 내가 사랑받게 될 것인가?'를 향해 있기 때문이다. 이성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 쿨쿨 잠이 들고 우리 마음은 사랑받을 기대에 가슴이 설레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을 시작하면 행복해질 거라 생각하는 것이 사랑의 함정이다. 사실은 그것이 사랑이 길을 잃게 만든다. 사랑을 하기 전에 '나는 사랑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나?' 혹은 '나는 지금 혼자서도 충분히 행복한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그때 '그래. 난 사랑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어'라든지 혹은 '나는 나 혼자서도 충분히 행복해!'라는 대답이 나오면 당신은 사랑의 날개를 펴고 날아오를 준비가 된 것이다.
사랑을 하기 전에 혼자 충분히 행복해야 한다. 그래야 사랑을 행복하게 해줄수 있다 . 행복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랑을 받아 행복하려 하면 결국 상대를 고갈시킬것이다.상대방도 보통 스스로 행복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랑을 통해 행복해지고 싶어 만났다면 두사람은 매일 서로 사랑해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불만을 하며 싸우다 헤어지게 된다.
상대가 언제나 더 좋은 사랑을 선택할 권리를 열어놓고 사랑을 시작한다.
사랑을 시작하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 다짐해두고 약속해 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상대방이 언제나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 더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 두는 일이다. 이 마음을 갖지 않고 사랑을 시작하면 그것은 무효다. 즉 그것은 내 욕심 채우기지 사랑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사랑을 하면 상대방이 나만 바라보고, 나만 만나고, 나만 생각하고 나만 사랑하기를 바라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서로가 서로에게 그렇게 해야 사랑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언제나 전적으로 서로의 완전히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만약 여기에 조금의 강요 같은 게 있다면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상대방보다 우위를 점한 상태에게 나만 만나고 나만 사랑해야 해! 하고 강제한다면 그것은 독재자가 공포 정치를 하는 것과 아주 유사한 형태가 된다. 물론 크기는 다르지만 성질에서는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힘과 무력을 동원해 나만 바라보고, 나에게만 손뼉 치고 나를 찬양해야 해! 하는 것이다. 상대의 무지 혹은 혼란이나 약함을 이용해서.....(실제로 사랑을 하는 연인이라고 하면서 폭력을 사용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그렇게되면 그 순간 사랑이 추락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순간 사랑은 사랑의 본성을 잃기 때문이다. 상대는 뭔가 답답하고 뭔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고 뭔가 숨을 쉴 수 없는 것 같고 뭔가를 오히려 잃은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상대는 도망갈 틈을 만들기 위해 자꾸 두리번거리게 된다.
상대방도 자신의 전 생을 함께 할 영혼의 동반자를 찾는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사람을 찾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지금 서로 만나고 있고 사랑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나 혹은 그가 서로의 영혼의 동반자가 아닐 수도 있고 혹은 진정한 영혼의 동반자를 찾아가는 과정 중에 서로를 채워주고 일깨워주는 만남일 수도 있다. 그 어느 쪽도 자신의 진정한 동반자를 찾아가는 과정이 방해 받는다면 행복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만약 상대에게 내 사랑을 강요한다면 상대방이 영혼의 동반자를 찾지 못한 불행을 내가 안고 가야 하는 것이다. 서로 함께 사랑을 하고 행복하기는 애초 기대하지 말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 사랑은 사랑을 빌미로 상대를 죽이는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상대방은 자신에게 더 좋은 상대를 찾을 수 있고 더 좋은 사랑을 찾아갈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어야 한다.
사랑은 철저한 기브 앤 테이크로 시작해야 한다.
기브 앤 테이크하면 너무도 상업적인 것 같지만 사랑이 가장 사랑 다울 때는 철저하게 기브 앤 테이크를 할 때다. 즉, 주고받는 것을 느끼고 인지하고 깨어있는 것이다. 사랑을 받으면 받는 줄을 알고 사랑을 주어야 한다. 사랑을 주었으면 준 줄을 알고 사랑을 받아야 한다. 주기만 하는 사랑이나 받기만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주기만 하는 사랑은 자원봉사에 가까운 것이고 받기만 하는 사랑은 양육에 보다 가까운 것이다. 성숙한 사랑은 주고받는 관계 속에 있다. 이에 대해 민감하면 할수록 더욱 섬세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건드리는 사랑이 된다.
이것을 좀 더 멋진 말로 하면 둘이 함께 추는 춤과 같은 것이다. 상대가 한 걸음 들어오면 나는 한걸음 물러나고 상대가 한 걸음 물러나면 내가 한 걸음 들어가면서 그렇게 둘이 아름다운 리듬을 만들어 함께 행복의 느낌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내가 한 걸음 들어갔을 때 상대가 한걸음 물러나지 않는다면 또 상대가 한걸음 들어왔을 때 내가 한걸음 물러나지 않거나 그 반대가 된다면 그때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이제 둘이 함께 추는 춤이 끝났다는 것을, 더는 함께 춤을 출 수 없다는 것을, 물론 잠시 쉬고 나서 다시 춤을 출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연습을 통해 더욱 아름답고 더욱 흥겹고 리드미컬한 춤을 출수 있다.
사랑은 사랑일 뿐이다. 사랑에서 자신을 찾지 말아야 한다. 사랑에서 자신을 확인하고 자신을 찾고 또 자신의 전 존재를 사랑에 빠트리면 우리는 사랑의 노예가 된다. 노예는 사랑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 오직 죽어라 하고 뭔가 노력을 하고 애를 쓰기는 하는데 행복하지는 못하고 그저 매달리고 고통을 받고 고통을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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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인 사람이 사랑받는다.
주기만 하는 사랑을 하는 사람보다 받기만 하는 사랑을 하면 좋을까? 우리는 모두 무의식 중에 사실은 그런 사랑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부모에게 사랑받는 어린아이 의식으로의 퇴행이지 성숙한 어른의 사랑이 아니다.
그런데 간혹 보면 이기적인 사람이 이타적인 사람보다 더 행복하게 사랑도 잘하고 결혼도 잘하는 경우가 많다.
늘 남을 챙기고 보살피고 자신에게 힘든 것은 혼자 꾹꾹 눌러 참는 사람은 사랑도 고통과 희생이고 결혼 생활 또한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랑을 할 때 이기적인 사람이 조금 더 행복하고 헤어질 때도 덜 힘들어한다. 요즘은 사랑할 때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가를 묻기도 한다. 사랑을 할 때는 보통 이기적인 사람이 갑이 되는 경우가 많다. 사랑의 고통과 슬픔은 언제나 을의 몫이다.
사랑 속에서 우리는 정말 많은 것을 얻으려 한다. 성장과정의 상처 치유와 위로 혹은 회복 그리고 내 정체성 찾기 그리고 부족한 자신의 성격이나 자질 보완 그리고 있는 그대로 나 자신을 받아주고 사랑해 주는 것과 더 많은 일상의 행복 등이다. 우리가 아름다운 사랑을 하게 되면 긴 시간을 거쳐서 이런 모든 것들이 저절로 충족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기적인 사람은 사랑의 에너지를 받아서 모두 자기 자신에게 투자하는데만 골몰한다. 상대에게 되돌려 줄줄 모른다. 사랑의 자린고비들이다. 그러면 사랑을 주는 사람은 계속 주기만 하면서 고갈되고 받기만 하는 사람은 계속 받기만 하면서 더 나아지고 행복해져 간다. 여기에 중독된 사람들은 바람둥이가 된다. 진정성 없이 사랑이 주는 에너지만을 찾아서 상대를 계속해서 고르고 바꾸는 것이다. 상대가 에너지가 있는 동안만, 에너지가 없으면 떠나서 다른 상대를 찾는다.
사랑의 갑이 이럴 때 을이 진정으로 온 영혼까지 다 열고 교감하는 사랑을 원하고 홀로 그것을 추구하고 있다면 엄청난 고통이 또 따른다. 이 또한 사랑이 사랑의 길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분명 사랑이긴 하지만 이건 연인의 사랑이 아니라 엄마의 사랑이다. 을은 갑에게 연인이 아니라 엄마라는 이야기다. 엄마는 긴장을 주는 존재가 아니다. 엄마에게서 무조건적인 사랑과 헌신의 에너지를 받고 아들은 자기 사랑을 찾아 떠나게 것이다.
을은 다시 엄마가 아닌 연인으로 돌아와야 한다. 연인은 꽃잎처럼 섬세하다. 조금이라도 주의를 게을리하거나 마음을 살펴주는 일을 하지 않으면 금세 아파하거나 슬퍼하고 눈물을 떨구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의 장미처럼
연인의 위치로 돌아오는 것은 을에게 굉장한 도전이다. 왜냐하면 사랑에서 너무 많이 벗어난 사람이 일이기 때문이다. 을은 이제 상대방의 심장에 깃든 자신의 마음을 되찾아 와야 한다. 그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얼마나 너 자신을 사랑하는가
사랑이 사랑의 길에서 벗어났을 때 사랑은 고통을 느낀다. 그 고통 속에서 혹독하게 물어야 하는 물음이 있다. "너는 얼마나 너 자신을 사랑하는가? " 이게 을이 놓친 것이다. 자기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상대방이 나를 사랑해 주기를 소망했던 것이 사랑의 길에서 아주 많이 벗어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랑은 자신은 고갈되어 텅 비어 있는 채, 혹은 자신은 빈 껍질일 뿐인 채로 서로 상대방을 통해 자신을 채우도록 되어 있지 않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사랑은 힘들어지고 어려워지고 무거워지고 끝내는 사랑을 주저앉게 만든다.
모든 사랑은 결국 자기 사랑이다. 자신 안에 사랑의 샘을 열고 그 샘으로 상대를 축복하고 적시고 나누는 게 사랑이다. 신화에서 보면 많은 사랑이 이렇게 샘가에서 이루어진다.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투자하고(외모를 말함이 아니다.)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는다. 진정으로 진심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한다. 상대가 온 존재를 다 던져 나를 사랑하게 하고 싶으면 나 또한 온 존재를 다 던져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그것은 갑질이나 이기적인 사랑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기적인 사랑은 외적으로는 그럴듯해 보여도 끝없이 상대를 괴롭히고 고통을 주게 된다. 그로 인해 자기 자신도 행복하기 어렵게 된다. 사랑이란 본질적으로 나를 통해 흘러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를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더욱 많이 사랑해야 한다.
나는 사랑받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래도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아픔과 고통이 내재해 있다. 사랑을 만나면 내가 사랑하는 만큼 사랑이 돌아오지 않아 속상하고 또 그럴까 봐 두렵다. 또한 나 자신이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을지도 확신이 서지 않아 불안하기만 하다.
이때는 자신의 정체성을 다르게 규정하는게 좋다. "나는 사랑받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 말은 사랑받지 못할까 봐 아주 작아져 있던 내 심장을 활짝 펴지게 할 것이다. 사랑받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을 순식간에 해독해 버릴 것이다.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은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더욱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만하다. 사랑이 되돌아오면 감사와 사랑으로 받을 것이요 사랑이 오지 않아도 그저 나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또 내가 즐겁고 행복한만큼 사랑할 것이다.
이럴 때 사랑의 마법이 일어난다. 모든 사람들은 사랑받고 싶어 하고,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 한다. 그래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을 결코 놓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저 사람은 이렇게 많은 사랑을 줄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더욱 많은 사랑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더더욱 함께 하고 싶어 할 것이다. 또한 사랑 받음으로 행복하고 채워지기에 그 또한 그 사랑을 나누고 흘러나가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어떻게 사랑할까?" "어떻게 더 행복할까?"를 생각하는것이 좋다. 사랑하는 법에 대해 연구하고 골몰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을 일굴것이다.
사랑의 씨앗은 내가 뿌리지만 사랑의 열매는 사랑의 계절이 돌아와야 한다.
간혹 외사랑이나 짝사랑만 하다가 끝을 본 적이 있다고 하자. 그로 인해 더할 수 없이 마음이 아플 수 있을 것이다 혼자 바보같이 사랑에 빠져서 시간과 돈을 쓰고 에너지를 낭비한 것이 부질없던 것처럼 느껴지고 손해처럼 느껴지고 바보같이 느껴져서 괴로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는 이렇게 생각하자. " 나는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사랑의 씨앗을 뿌린 것이다." 그 사랑은 지금 내 곁에서는 아니지만 언젠가 자기 계절을 만나면 싹이 트고 자라 성장하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언제나 곧바로 모든 일에 열매를 따는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때로는 운 좋게 열매를 따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잡초를 뽑아 주거나 혹은 꽁꽁 언 땅에 씨앗만 뿌리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지금은 씨앗을 뿌린 사람인 것이다. 내가 언젠가 운 좋게 열매를 땄던 일 또한 누군가 아주 오래 전에 뿌려놓은 씨앗이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언제나 타인이 심고 가꾼 열매를 먹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씨앗을 뿌리고 잡초를 뽑아주어야 한다. 그래야 한다면 말이다.
살아가다 보면 기브 앤 테이크가 일대일로 바로 일어나는 경우를 많이 경험한다. 예를 들어 친구에게 오늘 내가 과자를 나 누주면 다음날 친구가 과자를 또 나누는 그런 것과 같은 방식이다. 이것은 아주 흔한 경험이고 일차원적인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기본적인 것이다. 좀 더 성장하여 어른이 되면 좀 더 시야가 깊고 넓어지면서 기브 앤 테이크가 마치 아이들이 둥근 원으로 둥글게 늘어서서 수건 돌리기 놀이를 하는 것처럼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수건을 내가 옆 친구에게 주었지만 바로 그 친구가 나에게 그것을 되돌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제 마음대로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친구를 건너 건너가다가 아홉 번째 친구 앞에 주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수건을 수건이 아니라 우리가 기브 앤 테이크하는 어떤 것으로 대체하여 생각하면 된다. 이렇게 기브 앤 테이크는 불확정적이고 비선형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실컷 내게 사랑만 받고도 나를 사랑하지 않고, 사랑을 모르고 떠나간 그가 있다면 그는 다른 연인의 열매가 될 것이다. 그리고 또한 누군가 그렇게 떠나보낸 이가 내게 와서 내 연인이 될 것이다. 내가 내 연인을 떠나 보낼때 또 다른 곳에서 누군가는 내게 보내기 위해 사랑을 치유하고 키우고 채워주고 있을 것이다. 누가 나의 진정한 영혼의 동반지 인지 우리는 쉽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