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짧은 이야기 하나
21세기 Soul이라는 이름의 한 도시가 있었다. 그시대 모든 도시에는 은행들이 있었고 은행들은 도시 곳곳에 자기 고객들이 예금을 인출하거나 예치할 수 있도록 무인 현금 인출기를 두었다. 이 현금 인출기는 누구나 사용법을 알고 있었다. 은행의 계좌를 가지고 있으면 가서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기계에 돈을 입금 하거나 혹은 인출하여 사용할 수 있었다. 기계에는 "비밀번호가 유출되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그런데 한 예금 인출기는 조금 달랐다. 그 예금 인출기에는 이런 안내표지가 있었다. " 예금 인출 비밀번호는 0000 , 예금 예치 번호는 1111입니다 고객님들께서는 아래 비치된 플라스틱 카드를 넣고 필요에 따라 예금을 인출하거나 혹은 예금을 예치하십시오"
즉 이 기계는 누구나 와서 예금을 하거나 돈을 인출할 수 있게 되어 있도록 카드가 비치되어 있었고 비밀 번호가 공개되어 있었다.
이 기계를 우연히 발견한 사람들은 호기심으로 안내문대로 소량의 돈을 인출해 보았다. 물론 자기 계좌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물론 돈은 안내문대로 인출되었다. 사람들은 이 마법의 예금 인출기에 대해 쉬쉬했지만 곧 소문은 온 도시에 퍼져 나갔다.
예금 인출기 앞에 점차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예금을 인출하려고 기계 앞에 서면 기게 앞에 작은 전광판에는 "당신을 환영합니다."라는 문구가 떴다. 그리고 예금을 인출하면 전광판에는 " 당신이 부유해지길 빕니다."라는 문구가 떴다. 줄은 언제나 예금 인출 쪽에 길게 늘어섰다. 예금 예치 쪽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어찌 되었든 급하게 아이 학자금이 필요했던 부모나 용돈이 필요했던 학생들 그리고 생활비가 부족했던 직장인들은 매일 이 기계에서 제한 없이 원하는 액수만큼 돈을 인출해 갔다.
그러면서 그들은 점차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 이 예금 인출기는 누가 설치한 걸까? ' ' 여기에 있는 돈은 어떻게 계속해서 인출할 수 있는 걸까?' 사람들은 언젠가 이 예금 인출기 안에 든 돈이 바닥이 날거라 생각하여 조바심치며 몰려들었지만 아직까지 돈은 계속 인출되고 있었다.
이 예금 인출기 이야기는 결국 인터넷에 올려졌고 전국적인 화재가 되었다. 당연히 방송국과 언론사들이 취재를 하며 화재를 키워갔다. 사람들은 누가 이 현금 인출기를 설치했을까를 추적하고 알아보려 했으나 알 수 없었다. 방송에서는 유명인들을 불러다 누가 현금 인출기를 설치했을지에 대해 추론하기도 했다.
제일 먼저 나온 이야기는 세계적인 억만장자 중 하나가 설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이야기였다. 알다시피 그 시대 억만장자들은 자손 10대 혹은 100대가 놀고먹어도 될 만큼의 돈을 벌어 모아둔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는 은행들이 연합하여 대국민 서비스를 하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왔지만 이는 곧 돈만 밝히는 은행들이 그럴리가 없다는 강력한 반발로 곧 사그러 들었다. 그다음 나온 이야기는 히말라야에 사는 초인들이 벌인 일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다음 이야기는 현금인출 기계 자체가 하나의 인공지능 및 3D가 내장된 첨단 기계로서 기계 안에서 돈을 찍어 내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는 가장 큰 호응을 얻었지만 곧 그렇다면 그 기계가 제공하는 돈이 가짜 돈이란 말이냐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진짜 돈과 기계에서 인출한 돈을 대조하여 조사하는 일이 벌어졌지만 기계에서 인출되는 돈은 진짜 돈과 조금도 다름이 없음이 판명되었다.
어찌 되었든 이 현금 인출기는 연일 모든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가장 큰 이슈거리가 되었다. 정부는 국회를 열어 이 기계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철거하기 위한 법 제정을 논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론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어느 날 이 기계를 연일 조사하던 한 방송사가 이 기계 안에서 작은 칩을 발견했다. 이 칩은 방송에서 재생되었고 실시간 생중계로 전 세계에 보도되었다. 이 칩은 일종의 홀로그램이었는데 그동안 이 기계 앞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일종의 CCTV 같은 것이었다.
이 홀로그램이 재생되자 세상은 다시 한번 떠들썩 해졌고 방송은 연일 유명인사들을 초청하여 이에 대해 토론하기 바빴다. 이 홀로그램을 보면 어떤 사람들이 돈을 인출했고 또 어떤 사람들이 돈을 예치했는지 알 수 있었다. 돈을 인출해 간 사람들 중에는 노숙자나 홈리스 같은 불우한 사람들의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었다. 돈을 인출해 간 사람들은 모두들 중산층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더더욱 부유한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는데 그중에는 벤츠나 수입차를 탄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 유명한 회사 경영자의 모습도 있었고 정치인도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던 것은 전직 대통령들의 모습이었다. 방송은 그들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이 왜 기계에서 돈을 인출해 갔는지 인터뷰하려고 했으나 그들은 모두 인터뷰를 거절하고 만약 자신들에 대해 추측성 기사를 쓴다면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으름장까지 놓았다.
그러나 현금을 인출해 간 사람들 중에 다시 와서 현금을 예치한 사람들은 볼 수 없었다. 물론 현금을 예치한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홀로그램은 한참 허공을 비추다가 단 한 명의 20대 여성을 비추었다. 지금까지 예금을 예치한 사람은 그 20대 여성 단 하나뿐이었다. 그녀가 예금을 예치했을 때 전광판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 당신에게 축복을 빕니다. "라는 문구가 떴다. 그리고 방송은 기어이 그녀를 찾아 인터뷰를 했다. 그녀는 지방의 한 대학생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누구도 예금을 예치하지 않는데 왜 예금을 예치했느냐는 리포터의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책을 살 돈이 부족할 때 이 기계의 도움을 받았어요. 그래서 다시 도움받은 만큼 돌려놓으려고 온 거예요. 만약 사람에게 돈을 빌렸다면 반드시 갚겠죠. 이 기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어요 이 기계가 여기 있는 이유는 어려울 때 도움받고 형편이 나아지면 다시 다른 사람이 도움받을 수 있게 예금을 예치하라고 있는 거 아닐까요? 형편이 나은 사람이나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이 기계에 돈을 넣고 가난한 사람들은 여기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좋겠어요 저는 앞으로 돈을 벌거나 여유돈이 생기면 다른 은행이 아닌 모두 이 기계에 돈을 예치할 예정입니다. " 그녀의 이 말은 방송을 타고 곧 전 세계에 보도되었다. 그녀는 양심 스타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인터뷰를 듣고 처음으로 그 기계가 거기 있는 이유가 뭘까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방송과 인터넷은 곧 '우리가 언제부터 양심을 잃어버렸는가?' 그리고 '저 마법의 기계를 우리는 우리 모두의 공동 자산으로서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그때 선행으로 유명한 연예인들이 하나씩 둘 씩 돈을 예치하기 위해 나타났다. 그리고 선거철이 다가왔을 때 정치인들의 모습도 조금 보였다. 간혹 종교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홀로그램을 의식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줄은 여전히 인출 창구 앞이 길었다. 그 길이는 끝도 없이 도심을 빙빙 돌고 돌아 백번은 더 돌만큼 매일 길어졌다. 하지만 예치 창구 앞에는 간혹 젊은이들이 다녀갈 뿐이었다.
어느날 인출창구 앞 전광판에 숫자가 떴다. 그 숫자는 매일 줄어 들었다. 사람들은 이제 기계에 돈이 다 떨어져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카운트 다운이었다.
그리고 예치 창구 앞 전광판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떴다.
"당신은 언제 돌아오겠습니까?"
이 기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기계라면 당신이 이 기계의 예금 창구에서 돈을 인출하기 위해 마음먹고 줄을 서는데는 얼마 만한 시간이 걸리겠습니까? 또 이 기계의 예치창구앞에 서는 데는 얼마의 시간이 걸리겠습니까? 그 시간차가 당신 마음안의 가난과 결핍의 크기입니다.
"무엇을 더 가질까? "무엇을 얻을까" 하는 이 아주 가느다랗고 짧은 생각에 우리의 전 존재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습니다. 아니 우리의 전 존재가 그 작은 것에 지배되고 있습니다. 그에 비례하여 우리는 "무엇을 나눠줄까?" 하는 생각은 오랜 간격을 두고 아주 미미하게 하고 있는 편입니다. 이것이 보통 우리들의 내면의 실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