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삐, 이름 모를 개, 은종이, 그리고 맹렬이
뽀삐는 컸다. 4살이었던 내가 다루기에는 크고, 또 컸다. 8살이던 작은언니는 뽀삐 목줄을 잡고 능숙하게 산책도 시키고 그랬는데, 나는 그런 작은언니 옆만 바쁘게 쫓아다녔다. 한 번은 놀러 온 큰 이모 앞에서 뽀삐를 다룰 줄 안다고 자랑하려다, 하필이면 목줄이 풀려있던 뽀삐가 신나게 뛰어와 울면서 도망쳤다. 사실 그 외에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개 종류를 몰라 늘 진돗개라고 믿어왔지만 실제로 뽀삐가 어떤 종인지, 성격은 어땠는지. 다 모른다.
8살 때 엄마가 어디선가 얻어 온, 그야말로 똥개였던 멍멍이는 어느 날 할머니네 다녀오니 엄마가 팔아버리고 없었다. 그 작고 통통한 개는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17살 때 작은언니가 길에서 주워왔던 하얀 말티즈 은종이는 아직 엄마젖도 떼지 못한 채 버려져 있었다. 죽을뻔한 걸 데려와 2주 동안 젖병에 초유를 넣어 먹였다. 2주가 지나고 은종이는 하필이면 설날, 온 가족이 모여 있을 때 죽어버렸다. 아빠는 나한테 개가 죽었다고 우는 게 아니랬다.
그리고 18살 때 작은언니는 개를 또 한 마리 데려왔다. 두 달 정도 돼 보이는 작은 말티즈는 참 발랄하고 귀여웠다. 작은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개의 이름을 바꿨다. 순둥이에서 맹렬이로.
오랜 시간을, 많은 일을 같이 겪어 그런지 맹렬이만큼 기억에 남는 개는 없다. 생각해보니 맹렬이는 용케 내가 대학교에 가는 것도 보고, 내가 졸업하는 것도 보고, 내가 오랜 기간 백수로 사는 것도 보고, 마침내 취직을 하는 것까지 봤다. 언니들이 결혼을 하는 것도, 작은 언니 아기가 태어나고 돌잔치를 하는 것도 다 봤다.
우리는, 적어도 내 기억에 ‘우리는’ 많은 얘기를 했다. 내가 두 번째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 졸업 후에 아무 직업도 갖지 못할 때도 맹렬이는 함께 있었다. 하필 그 기간에는 나도 가족도 모두 쑥대밭 같은 기간이었다. 맹렬이는 그 집에 산다는 이유 만으로 나조차 보기 싫었던 끔찍한 일을 많이 겪었다. 사람들에게 말하기 힘든 그 일들을 아는 유일한 존재가 우리뿐이어서, 비참한 내 옆에는 맹렬이가, 불안한 맹렬이 옆에는 내가 늘 말없이 엎드려있었다.
맹렬이는 몸이 약했다. 원래부터 약해 한 달에 한 번 꼴로 병원에 갔다. 크고 작은 수술과 처치는 다 셀 수도 없을 거다. 2003년에 태어난 후부터 늘 위기를 잘 이겨내던 맹렬이는 작년에, 그러니까 내가 취직을 한 그 주에 죽었다. 취직을 한 직후라 쉴 수도 없어 점심시간에 혼자 나와서 엉엉 울었다. 아빠는 개가 죽었다고 우는 게 아니라는 소리를 이번에는 하지 않았다. 하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회사 간 우리를 대신해서 맹렬이의 화장터에 혼자 따라갔던 사람이 아빠다. 화장을 한 맹렬이는 뼛가루로 만든 푸른 돌멩이가 되어 돌아왔다.
맹렬이가 죽은 지 일 년이 지났다. 맹렬이가 없었던 것처럼 잘 살고, 동시에 맹렬이가 지금도 있는 것처럼 가족들과 맹렬이 이야기를 한다. 다만 음식을 흘리면 빨리 줍고, 문을 닫으려다가 한 번 돌아보고, 바닥에서 작은 소리가 들리면 바닥을 훑어보는 등의 몸에 밴 습관이 남았다. 습관은 생각보다 짙고 강하다. 이제 점심시간에 나가 울지도 않는다. 그러다 문득 맹렬이를 떠올리며 들었던 노래를 끄거나, 맹렬이와 같이 산책하던 길을 애써 돌아가거나, 집으로 걸어가다 운다.
이제는 새로운 개나 고양이, 아무튼 살아있는 사족보행 짐승이라면 뭘 키워도 전보다 잘 키울 것 같은데, 어떻게 해도 새로운 동물이 맹렬이의 자리를 채울 수 없다는 걸 안다. 정말이지 어떤 것도 그 마음을 채울 수는 없다.
그것이 사람이든 아니든, 소중한 존재와 이별한다는 건 늘 고약하고 잔인하기 짝이 없다. 그러니까 맹렬이 이후로 아마도 내 삶에서 새 반려동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아무리 내가 늘 개를 키우고 싶어 했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