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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Nov 12. 2017

할 만큼 했다.

그날도 최종 합격자 명단에 나는 없었다.



최종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없었다. 몇 명 되지도 않는 최종 합격자 명단을 아주 꼼꼼하게 몇 번은 훑어본 것 같다. 합격자 명단을 두고 속독, 통독, 정독, 발췌독까지 다 했지만 내 이름은 없었다. 내가 지나온 전형에서 아쉬운 점은 없었는지, 최종 면접 때 내가 한 실수는 무엇이었는지 머리를 굴려보다가 드러누워버렸다. 그리고 일주일을 몸살로 이불 속에서 끙끙 앓았다. 이번에는 꼭 PD가 될 수 있을줄 알았는데.


일주일이 지나고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온 나를 처음 맞아준 건 크리스마스와 들뜬 연말 분위기, 그리고 언니의 임신 소식이었다. 크리스마스, 연말, 작은언니의 임신. 그 모든게 완벽한 소식이었다. 단, 내가 PD만 되었더라면. 그리고 또 하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2014년 새해.


미루고 싶었지만 그렇게 새해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살면서 한 해가 그렇게 길게 보인 적은 없었다. 무엇하나 계획된 것 없는 365일은 길고 멀게만 보였다. 대학생의 시간표도, 직장인의 근무시간도 없는 백수의 365일은 그랬다. 물론 그전처럼 스터디를 하고, 간간히 나오는 채용공고를 체크하고, 이력서를 쓰며 보내겠지만 그렇게 보내는 한 해는 2013년을 두번 사는 것과 다름 없었다. 책갈피 하나 안 꽂힌 두꺼운 책 같은 한 해였다. 나에겐 책갈피 하나가 절실했다.


그 무렵 나는 2년째 회사생활을 하며 피폐해진 영혼을 부여잡은 새미와 커피를 마시며 언제 실행될 지 모를 영국 여행을 이야기했다. 2009년 한 해를 보냈던 영국이 더 그리워졌다. 새미는 퇴사를 꿈꿨고, 나에겐 막막하기만 한 2014년이 있었다. 우리 진짜 갈래? 내 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진짜 가자는 말 이외에 계획되거나 준비된 것이 없었다.


몇년 째 말뿐이던 여행이야기는 그렇게 현실이 되고 있었다. 새해가 시작되고 일주일이 채 되기 전에 우리는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계속해서 시험을 준비중이던 내가 어떤 모양새의 언론인이라도 된다면 이 여행계획은 없던 일이 되는 것이라는 전제 하에서 여행은 시작되고 있었다. 내심 내가 뭔가 되어 여행이 취소되길 바랐다. 그리고 5개월 후, 나는 히드로공항으로 가는 비행기에 앉아있었다.


그래, 가자. 할 만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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