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케이지
4분 33초의 침묵
한 연주자가 조율을 끝마친 완벽한 상태의 피아노 앞에 앉습니다. 금방이라도 멋진 곡을 쏟아낼 듯한 긴장된 모습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입고 있던 재킷의 속주머니에서 '작은 스톱워치'를 꺼내죠.
스톱워치?
관객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무대를 주시합니다. 곧 자신의 청각을 만족시켜 줄 감미로운 멜로디를 상상하며 말이죠. 이윽고 스탑 워치가 작동하고, 연주자는... 어떤 연주도 시작하지 않습니다. 시간에 맞춰 악보 넘기는 소리만 때때로 들려올 뿐이죠. 그렇게 4분 33초. 그는 그동안 흘러내리는 땀을 닦거나, 옷소매를 체크하거나, 가끔 고개를 끄덕거리지만, 끝까지 건반 위엔 손을 올려두지 않습니다. 마침내 스톱워치가 울리고, 그는 정중히 인사를 남기고 퇴장합니다.
“Everything we do is Music.”
이는 현대 음악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존 케이지의 <4분 33초> 초연 실황의 모습입니다. 이 낯선 퍼포먼스는 호평과 혹평을 넘나들며 날이 갈수록 관중과 평단에게 재단당했지만, 결국 그의 패기와 철학을 인정해 주게 됩니다. 존 케이지는 이 강렬한 실험 작품의 끝을 멋진 승리로 장식했죠.
이러한 존 케이지의 실험적 시도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줍니다. 일반적인 연주회에선 '소음'이라 규정되어 버리는 현장의 여러 소리들, 예를 들면 사람들의 웅성거림이나 기침, 하품 소리, 옷깃이 스치는 소리처럼 잔존하는 소리들까지... 어쩌면 이 소리들도 공연의 현장에서 연주되는 하나의 '곡'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를 제지시키지 않고 한 곡의 내용으로 수용하는 건 어떨까?
어쩌면 <4분 33초>는 연주가 진행되는 어떤 공간 자체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관객들까지도 연주자의 일부로 참여시키는 셈이죠. 이는 아주 흥미로운 접근입니다. 누가 공연장에 찾아왔는가는 물론, 이 모든 음들을 둘러싼 공연장이 어떤 형식으로 지어졌는지에 따라서도 소리의 파동이 변하게 될 테니까요. 우리가 라이브를 보러 애써 현장을 찾는 이유 역시 이러한 '변칙적인 생생함'을 느끼기 위함입니다. 존 케이지는 자신의 의도를 지우고 침묵을 유지하는 대신 정적을 찢고 나오는 소리들의 우연과 충돌들을 연주하였던 것입니다. 연주를 포기함으로써 또 하나의 연주를 획득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굳이 그가 피아노 앞에 앉을 이유가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저는 ‘반드시 앉을 필요가 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는 일종의 경기를 알리는 신호탄의 역할이니까요. 연주를 위한 아주 최소한의 규칙인 셈입니다. 그는 반드시 피아노 앞에 앉아 있어야 하며, 스톱워치가 작동해야 하며... 관객들이 한 공간에 모여야 하며… 이처럼 연주를 위한 모든 채비가 갖추어져 있어야만 이 퍼포먼스는 비로소 완성됩니다.
동양철학을 만나게 된 존 케이지
이처럼 실험적인 음악에 심취했던 그는 음악에 대한 학습과 동시에, 인도와 일본의 철학자와 종교인으로부터 그들의 사상을 전수받기 위한 노력을 했습니다. 동양사상에 매료되었던 그는 그들을 만나 음악과 예술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를 하게 되지요. 그들은 가르침을 원하는 존 케이지에게 맹자와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태도처럼, ‘가르치지 않는 것 역시도 곧 가르침의 한 방법’이라 전합니다. 가르치길 원하지 않는 것도 스승의 자유이며, 애초부터 가르침이란 배우기를 원하는 스스로가 수행해 나가야 할 의무이자 책임이라는 의미였지요.
이처럼 그는 우리에게 자유에 대해 묻습니다. 현재 실제하고 있는 모호한 개념뿐인 자유가, 또는 특정 상황에서 어떤 도구로서의 역할로만 실행되고 있는 자유가 과연 진정한 자유일까? 그 저변에는 교육과 통념에 사로잡힌 무언가가 여전히 우리를 강렬하게 붙들어, 바로 이것이 자유라는 착각을 일방적으로 심어주는 것이 아닐까?
실험과 전위 - 완벽한 정적이 존재하는가?
완벽한 정적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요? 까다로운 이 질문엔 까다로운 이런 답을 내려볼 수 있겠습니다. 정적을 느끼는 ‘자기'가 그 안에 존재하는 한 그럴 수 없다고 말이죠. 편집증에 시달리던 한 피아니스트가 모든 소리를 흡수하는 방을 지어 그곳에 머물려했지만, 결국엔 자신의 심장 소리에 못 이겨 그 방을 뛰쳐나왔다는 한 일본 드라마의 에피소드가 떠오릅니다. <4분 33초>라는 작품 역시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바탕으로 탄생하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는 하버드 대학에 있는 모든 소리를 흡수하는 녹음실을 찾았으나 여전히 귓가를 맴도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고, 차라리 그 소리들을 제외시키는 대신 오히려 도구로 삼기로 생각을 전환했던 것이죠.
이외에도 그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피아노 소리를 일부러 낯설게 바꿔보기도 하였습니다. 다양한 도구를 사용하여 피아노 현에 끼워 넣고 연주해, 불편하고 색다른 소리를 취한 것이지요. 그의 실험은 악기뿐만 아닌 방식에도 있습니다. 주사위를 던져 미래의 행운을 점치는 중국의 주역에서 영감을 받아, 주사위를 던져 나온 눈을 보고, 우연성에 의지한 연주를 하기도 했습니다.
감상에서 경험으로
존 케이지의 곡의 감상은 곧 체험이자 경험입니다. 매번 연주될 때마다 색다른 소리들의 결합을 체험할 수 있으며, 그 공연장에 모인 어느 누구도 이를 예측할 수 없을 테니까요. 항상 열려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집합된 곡인 것이죠.
어쩌면 존 케이지는 우리에게 세상을 신뢰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치 앞도 판단할 수 없는 현재이지만, 조금만 집중하면 언제든지 포착할 수 있는 기회와 단서들이 우리 곁에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소한 것들이 모여 하나의 멋진 연주가 될 수 있다는 긍정의 가능성을 말입니다. 이처럼 그의 곡은 우리로 하여금 미지의 세상을 감지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그만이 할 수 있는 유별난 방법으로 말이죠.
그럼 여기까지,
당신의 주단단으로부터.
추신: 내가 어떤 글을 완성했다면 그 글을 계획하고 쓰지 않았다고 해서 무의식적으로 썼다고 할 수 없다. 의도한 것과 의도하지 않은 것의 구분은 결과나 과정 속에 있지 않고 특정 조건을 충족하는 행위에 대해 그것이 의도라고 결론을 내리는 사고 과정 속에 있다. 운명이란 사고 과정의 메커니즘을 뜻한다.
(정지돈, <존 케이지와의 대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살 것이다, 위크룸프레스,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