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 한 달 차입니다만

09 나의 가짜 워킹홀리데이

by 잉플

평소와 다르다 느껴질 만큼 유독 아침이 힘든 날이 있다. 그렇다고 원래 아침이 힘들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근 한 달간의 내 하루 시작은 새벽 4시부터였다. 벌써 한 달쯤 되었나 보다, 워킹홀리데이의 가면을 쓴 일상을 보낸 지가.


"잠 좀 잤어?"

"새벽에 자꾸 깼는데, 그래도 합쳐서 네 시간은 잔 것 같아. 오빠 더 자."


복작하게 출근 준비를 하는 소리에 남편이 잠에서 깨서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로션을 바르고 있는데 거울에 비친 남편의 모습은 세상 졸린 얼굴로 간신히 앉아 있는 듯했다.


"오빠도 출근해야 하잖아. 얼른 더 자, 운전할 때 피곤해."

"달이 가는 거 보고."


지난 한 달 동안 별 무리 없이 출근을 잘만 해 왔는데, 오늘따라 유독 출근이 하기 싫었다. 오전에 겨우 네 시간의 근무 시간을 채우고 오는 일이지만, 수천 개가 되는 물건을 입고하는 일이라 몸이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다. 무거운 물건을 드는 것도, 냉동창고에서 한 시간이 넘도록 물품을 정리해 내는 것도, 매장을 누비며 물건을 찾아야 하는 일 또한 여태 해 오던 일과는 전혀 다른 장르로 느껴졌다. 인테리어를 하면서 현장에서 근무해야 하는 날도 많았는데, 설계자로서의 업무는 대부분 머리를 쓰는 일이었기에 정신적인 피로도가 컸다면 이 일은 육체적 노동이다 보니 정신을 쓸 겨를이 없을 만큼 신체적 피로도가 엄청나다. 매장 오픈 준비에 일조하는 일이기에 새벽부터 출근해야 했고, 나는 반년이란 시간을 걸고 오픈조 인원으로 계약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난 이 일이 신체적 피로도가 엄청난 일이라는 걸 알고도 지원했다. 이력서를 내던 날 신중하게 고민해 보고 지원한 건 아니었지만,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충동적이었던 나의 근무 지원은 계약 체결까지 되어 어렵게 직장을 관두고도 백수로 오래 살지 못했다.


나는 왜 쉬지 못하는 걸까? 쉬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면서도 할 일이 없는 시기를 견디지 못해서 얼떨결에 시작하게 된 육체노동. 그리고 영어 공부. 난 나의 강박장애로부터 실현된 이 상황을 가짜 워킹홀리데이라고 칭하기로 했다. 그게 마음이 편했다. 실제로 어학연수를 간다고 6개월을 해외에 나가 있는 사촌동생 이야기를 들으며 영어 공부를 하면서는 나도 어학연수 중이라고 합리화했고, 한 달 전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부터는 워킹홀리데이로 정의했다. 신기하게도, 정말 이상하게도, 나는 내 마음속으로 무언가를 정의하고 나면 마음이 편해졌다. 정의되지 않는 것을 마주하는 순간이 불안한 것 같다.


워킹홀리데이 한 달에 접어드니 이 일을 시작하길 잘했는지 혹은 후회하는지에 대해 조금씩 감이 오기 시작했다. 나의 하루가 오전과 오후 둘로 나뉜다고 했을 때, 오전엔 시작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오후엔 괜히 시작했나 싶은 작은 후회가 생겼다. 확실한 건 오전 내내 근무를 하면서는 잡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매장에서 당황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고서야 물건을 입고하고 정리하는 일은 어떤 생각 따위를 할 겨를이 정말 없었다. 그저 이 물건을 어디에 넣어야 할지, 어떻게 움직여야 몸이 좀 편할지에 대한 생각만 하며 정신없이 할 일을 한다. 그건 나 말고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게 좋았다. 일을 하면서 사람들과 입씨름을 한다거나 기싸움을 할 일이 없다는 게 좋았다. 그저 나만 열심히 일하면 그뿐이었다. 내 할 일을 하고 있으면 그 누구도 나에게 딴지를 걸지 않는다는 점이 원래 내가 하던 일과 가장 다른 점이었다. 상상력을 펼쳐야 할 필요도, 설득을 해야 할 필요도, 누군가의 비위를 맞춰야 할 필요도 그곳엔 없었다.


아, 일하면서 별 생각이 다 들었던 적이 한 번 있었는데, 그건 냉동창고 안에서의 일이었다. 냉동식품의 재고 수량을 체크해야 하는 일을 하던 날, 나는 정말 내 손가락이 그 자리에서 없어져 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상상을 했다. 동상에 걸리면 손가락을 잘라내야 하나, 피부가 죽어 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그런 상상. 얼굴보다, 귀보다, 발바닥보다 나는 유독 손이 추위에 약했는데, 그 약점이 냉동창고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그날은 일을 하면서도 이 일을 시작한 걸 후회했던 날이자 서러웠던 순간이었다. 이러면서까지 살아야 하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으니까.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나는 약간 마조히스트 성향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마음이 든 뒤로는 오히려, 어차피 난 지금 희망차게 살아갈 방법도 모르는데 이렇게 살다 동상 걸려 죽어도 상관없겠단 생각이 들면서 묘한 쾌락을 느꼈다. 이렇게 이 한 몸 불사 질러 지쳐 쓰러질 때까지 굴러 보자 하는, 목적지가 어딘진 몰라도 계약 기간은 채워 보자 하는, 이상한 독기와 함께. 이 일을 그만둔다고 해서 다른 일을 편하게 하지도, 집에서 편안히 쉴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


집에 온종일 처박혀 산 건지 죽은 건지 모를 사람처럼 무욕, 무망이 가득한 채 지냈을 때도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체감할 수 없었으나 요즘도 별 다를 것 없는 듯하다. 지난 한 달이란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나는 내가 만들어 놓은 일상 루틴에 따라 그저 움직여 왔던 것 같다. 시간별로 그득한 계획이 없으면 아직도 불안감이 올라오고, 퇴근을 한 후 영어 공부 시간 외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늘 초조하다. 남아 있는 시간마저 어떤 루틴으로 채워 넣기에는 지쳐 버릴까 봐 겁이 나고, 덕분에 나는 요즘 집안일을 성실히 해내는 사람이 되었다. 남는 시간에 집안일을 하는 것만큼 뿌듯한 일이 없다. 청소를 할수록 비워지고, 설거지를 할수록 내가 끼니를 잘 챙겨 먹었다는 증거가 된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아직 그럴 레벨이 아니기에 이렇게 내 하루를 살아내 간다. 그러고 보니 근래에는 미치도록 죽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제발 사라지고 싶다거나 모든 게 끝이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흐릿해졌다. 매일같이 누군가에게 인정받으며 살 수는 없지만 늘 내 마음은 인정받고 싶은 것 같다. 잘하고 있다고. 지금의 나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거라고. 그렇게 주어진 시간을 살다 보면 지금만큼 마음 불편하고 복잡한 일은 없을 거라는 그런 확신과 인정을 지금도 받고 싶다. 누군가에게 이런 내 마음을 이야기하고, 공감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이 위로가 되기도 했다.


하루를 마치며 일기를 적고, 블로그에 기록하는 일을 끝으로 나의 워킹홀리데이 한 달간의 마지막 날이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