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는 일이 없잖아

13 나의 가짜 워킹홀리데이

by 잉플

지난 짧은 여행에서 한 번의 기절 후 나의 불안감은 마음에 더 번지게 되었다. 의사 선생님과의 상담에서 그날의 일을 언급했었는데, 선생님은 아마 인형 뽑기를 구경하면서 울렁거리고 어지러웠던 게 기절 전의 신호였던 것 같다고 했다. 덕분에 나는 이제 일상 속에서 조금만 어지러워도 기절하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을 하며 하던 일을 멈추게 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혹시나 작은 어지러움이나 울렁거림이 또 한 번의 신호일까 봐 무시할 수가 없었다.


주로 어지러운 증상은 오전에 잦게 나타났다. 새벽 출근을 해서 퇴근을 하기까지가 모두 오전 중에 일어나는 일들이었고, 워낙 몸을 자주 움직이며 앉았다 일어나는 일이 잦은 업무이기 때문에 기립성 저혈압, 현기증과 같은 증상들이 자주 느껴지고는 했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원래도 일하면서 어지러웠던 것 같은데, 나는 일이 워낙 고되다 보니 다른 동료들도 이 정도 현기증은 다들 동반하며 일하고 있는 줄 알았다. 매니저가 오늘 일은 할 만했는지 묻는 물음에 '오늘은 좀 더 어지럽더라고요' 대답했는데, 나에게 빈혈이 있는지 물어보며 '왜 어지러우시지?' 하는 대화에서 알아차렸다. 아, 원래 어지러우면서 하는 일이 아니었구나. 나만 어지러운 거였어. 그날이 심난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근무 계약 기간은 6개월, 나는 이 기간을 다 채우고 싶었는데 어쩌면 그러지 못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어지러움을 동반한 업무를 계속하다가 상태가 더 나빠지면 안 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매번은 버틸 만한 정도의 증상이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중간중간 컨디션을 가다듬으면서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근무 한 달 차를 넘기고도 2주를 더 채울 즈음이었다.


그날은 평소보다 어지러운 증상이 버틸 수 없을 만큼 버거웠다. 이 며칠 유독 밤잠 사이에 자주 깨고는 했는데, 그게 컨디션에 영향을 끼친 걸까. 휴게 시간을 받으려면 아직 한 시간이 더 남았는데 당장 몸을 누이거나 앉아야 할 것만 같았다. 10초에 한 번 꼴로 세상이 노래졌다. 일에 진전이 없어 마음은 초조하고, 세상은 노랗고, 설상가상으로다가 오늘따라 일이 많았다. 여기저기서 동료들의 바코드 찍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의 바코드 스캔 소리는 그에 비해 느리고도 느렸다. 버티다 못해 매니저에게 상황을 설명하니 휴게 시간을 지금 갖는 게 좋겠다는 답변을 들었다.


휴게실에 가자마자 소파에 몸을 뉘었다. 심장박동이 빨라진 게 느껴졌다. 심장만이 아니라 머리까지 두근대는 바람에 누워 있는데도 어지러움이 가시질 않고 머물렀다. 10분쯤 쉬었을까, 이건 뭐 도저히 쉬는 것조차 힘들 수준으로 컨디션은 계속 떨어져 갔다. 결국 그날은 매니저에게 조퇴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이대로 버티다가는 뜬금없는 기절 엔딩을 또 보게 될 것 같아 두려웠다. 다행히 그날 집에서 쉬고 있던 남편이 있었고, 연락해 상황을 설명하니 남편이 곧장 나를 데리러 와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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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퇴를 하고 향한 곳은 병원이었다. 아무래도 증상에 대해 진료를 받아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지난번에 인형 뽑기를 하다가 기절했던 일들부터 경험했던 어지러운 증상들, 오늘 유독 참을 수 없었던 현기증에 대해 설명하니 피검사를 하게 되었다. 당장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었는지 당일 빈혈약만 처방받고 검사 결과가 나오길 기다리기로 했다. 다른 때보다 혈압이 좀 낮게 측정이 돼서 그것도 마음에 걸렸는데,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나는 하나의 걱정을 더 달고 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다행히 조퇴 후에 컨디션이 더 나빠지지는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 처방받은 약을 먹고 좀 자고 일어나니 잠이 보약이라는 말이 훅 와닿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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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진 결과가 나왔다는 문자가 온 건 검사를 한 지 사흘만이었다. 일하던 오전 중에 수신된 문자를 뒤늦게 보고 퇴근길에 병원을 들러 결과를 확인해 볼 참이었다. 일을 하는 내내 검진 결과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오늘도 어지러움이 동반되는 상황들에 불안감은 가증되었고, 제발 큰일은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그 와중에 요즘 난 참 살고 싶은가 보다 싶었다. 아픈 거 싫구나. 큰 병에 걸려 갑자기 죽기는 싫구나, 나는.


검사가 진행된 여러 항목들이 있었는데, 그중 몇 가지 수치가 정상 범위에서 벗어나 있는 결과를 봤다. 의사 선생님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강도가 높으면 가능한 그만두는 쪽으로 권고하는 눈치였고, 나는 마음이 참 곤란했다. 그만두려면야 그만둘 수 있는 일이었지만, 나는 또 내가 가진 이유 모를 강박과 일을 그만두는 게 스스로의 약속을 저버리는 일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안 좋았다. 이 며칠은 참 순조로운 하루하루였다 싶었다. 내가 그러면 그렇지. 또 일이 이렇게 꼬이지. 이러면 역시나 나는 되는 일이 없잖아.


비관적인 생각은 무섭도록 빠르다. 나를 집어삼키는 속도가, 그냥 비관적인 생각의 속도 그 자체가. 이런 일 하나를 그냥 넘기지 못하는 내게 문제가 있음을 확실히 알겠다. 나는 내 몸이 안 좋다는 것도 걱정이었지만, 사실 일을 그만둬야 한다는 게 더 걱정이었다. 그냥 막연한 걱정, 계획된 6개월을 채우지 못할 것 같다는 확신이 들면서는 점점 불안감이 올라갔다. 이렇게 끝나면 나의 가짜 워킹홀리데이는 어떻게 되는 걸까. 진짜로 가짜가 되는 것 같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스스로 해 보겠다고 다짐하고, 스스로 일궈낸 계획들이 틀어지니까 다른 게 아니라 내가 가짜가 되는 것 같았다. 이럴 때 나는 내가 더 싫어진다. 견디기 힘든 슬픔이 밀려온다. 내가 밉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