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나의 가짜 워킹홀리데이
상상력이 나에게 지나친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다. 내가 상상하는 내용이 불안감을 만났을 때 그것은 극대화되는데, 그럴 때마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내가 탄 버스에, 지하철에 테러범이 있으면 어떡하지? 폭탄물을 설치한다면? 내가 머무는 백화점이 무너지면 어떡하지? 만약 이 건물이 부실 공사로 지어진 건물이라면? 지나가던 사람이 갑자기 나에게 칼을 꽂거나 주먹질을 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 상황에 뭘 어떻게 할 수는 있는 건가? 이런 생각으로부터 나는 극도로 긴장하기 시작하고, 요동치는 심장을 붙잡아야 한다. 혼절해 버릴 것 같은 기분도 종종 느끼고는 한다. 공황 장애를 앓는 사람들이 기절을 한다면 이런 생각의 끝에 정신을 잃는 걸까 생각하기도 했다.
"아직 체크인 시간이 1시간 남았어."
"로비에서 좀 기다리자, 그럼."
오랜만에 1박을 잡고 남편과 서울 종로 근방을 돌아다녔다. 내일 일정까지 이야기하자면, 예전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알게 된 동묘 시장에 들러 빈티지한 옷을 구하고 싶었고 마지막 일정으로는 연극 하나를 보고 집으로 향하는 계획이었다. 오늘은 광장 시장에 들러 식사를 하고, DDP 전시 관람도 했다.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서적 구경, 인사동 쌈짓길에서 추억의 짱 깸 뽀 게임도, 진짜 맛있다는 우육면 식당에 미리 예약을 하고 웨이팅 없이 저녁식사, 밤거리에 환하게 빛나는 청계천의 조명 전시를 보며 거닐었다. 남편과의 오랜만에 데이트다운 데이트가 새삼스럽고 기분이 좋았다. 고작 집에서 한 시간이면 오는 서울을 돌아다니는 시간이었지만, 외국인들도 꽤나 많았어서 해외여행을 온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모든 일정을 마치니 숙소에 들어가고 싶은 피로감을 느꼈지만, 체크인 시간이 한 시간 정도 남은 상황에서 우린 추위를 피해 로비에 먼저 들어가 있기로 하고 숙소로 향했다.
"오늘 재밌었다, 진짜로."
"오랜만에 배낭 메고 다니니까 어깨가 아파."
남편 어깨에 메어진 가방엔 하루 동안 필요한 짐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뚜벅이 여행을 해 보자고 둘이서 배낭을 하나씩 메고 온 터였는데, 남편 가방에 들어 있는 짐들이 무거운 것들이었고 하루 종일 메고 다녔으니 어깨가 아플 만했다. 로비에 마련되어 있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 몸을 기대 눕듯이 하다가 이내 남편의 목 주변을 꾹꾹 눌러 풀어 주니 가만히 있는 남편. 좋은가 보다.
"이 정도로 누르면 안 아파?"
"시원해."
체크인이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 숙소의 로비는 따뜻했고 나른해서 눈이 무거워졌다. 남편 어깨를 마저 주물러 주고 다시 눕다시피 앉아 축 늘어져 있으니 내게 좀 자고 일어나라는 남편이었다.
"에이, 여기서 어떻게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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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졸았다. 그것도 30분이나 졸았다. 아니, 잤다.
"아직도 30분 남았어. 더 잘래?"
"아냐... 다 잤어. 개운하다."
우리가 머물게 된 숙소 위치가 이렇게 광란의 밤거리인 줄은 몰랐는데, 숙소 출입문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은 매우 뜨거웠다. 몇 군데의 포차와 술집엔 젊은 사람들이 가득했고,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신나는 노래들. 남은 시간을 더 로비에 있기는 지루해서 잠깐 둘러보자고 나와서는 앞에 보이는, 옆에 보이는 인형 뽑기 샵을 보고 갈팡질팡 고민을 했다.
"여기가 더 다양해 보여. 여기로 가자."
오늘도 인형 뽑기에 얼마를 쓰게 될지 모른 채 기필코 하나는 낚아 가겠다며 입구에 들어섰다.
"와... 진짜 시끄럽다. 내 목소리도 안 들려."
여태 가 봤던 인형 뽑기 샵 중에 제일가는 노래의 음량. 무슨 클럽에 들어온 것처럼 귀가 울렸다. 사람들은 가득했고, 각기 자신이 뽑고 싶은 인형 뽑기 기계 앞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어떤 커플은 벌써 3개나 뽑아 들고 있기도 했다. 아마 인형 뽑기를 하면서 분비되는 호르몬 중 비중이 제일 큰 건 도파민인 것 같다. 매번 돈을 잃으면서도 어쩌다 한 번 인형을 뽑는 날이면 여태 쓴 돈에 대한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달까. 남편이 하는 걸 구경하다가 감질이 나서 아주 마음이 가려웠다.
"이거 이거, 완전 사기야. 답답하다. 저걸 저기서 놓아 버리네!"
"진짜. 될 듯한데, 자꾸 놓네."
"으, 답답해. 왜 저래 저거."
남편 옆에서 답답한 마음을 못 숨기고 떽떽거렸다. 정말로 답답했다. 인형 뽑기 구경하면서 이렇게나 예민했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유난히 속이 긁혔다. 울렁거리고 어지럽기까지 했다.
"오빠, 나 진짜 어지러울 지경이야."
"딱 5천 원만 더 해 보고 안 되면 말자."
마지막 오천 원을 넣고 집중하는 남편을 뒤로하고 나는 근처에 눈에 띄는 인형이 있어 홀린 듯이 향했다. 나는 삼천 원만. 집게는 힘이 없었고, 아까 남편이 하던 것처럼 될 듯한데 되지 않았다. 정말 딱 다섯 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이걸 어쩐담. 진짜 딱 오천 원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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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 달아. "
정신을 차려 보니 밝은 빛을 내는 라인 조명이 눈앞에 보였고, 내 머리 위엔 남편이 얼굴이 보였다. 뭐지?
"괜찮아?"
무슨 상황인지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내가 왜 여기 누워 있는 건지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정말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남편은 나를 부축해 일으키고 우선 인형 뽑기 샵을 나와 나를 구석진 곳으로 이끌었다. 떨리는 팔다리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아직까지 정신이 혼미한 느낌이었다.
"좀 어때. 괜찮아?"
"어떻게 된 거지?"
"뒤돌아 보니까 달이가 쓰러져 있었어."
기절을 한 것 같았다. 인형 뽑기를 하던 중이었던 건 기억이 나는데, 어떤 순간에 기절을 하게 된 건지는 기억이 안 났다. 기절하기 직전에 뭔가가 고통스러웠다거나 한 게 없었다. 한참을 구석에 앉아서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데, 어느 외국인 커플이 우리에게 다가왔고 나에게 뭔가를 건넸다. 내가 뽑으려던 인형이었다.
"Ah? I'm okay."
기절한 게 안쓰러웠나. 이걸 왜 주지.
"It's yours!"
"I'm okay. No thanks."
얼마나 안쓰러우면 저걸 주냐고.
"You got it! It is really yours!"
"Did I get it?"
"Yes, You got it!"
웃상의 두 외국인들에게 건네받은 인형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들은 Good bye- 하며 떠났고,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인형을 품에 안았다.
"뭐지. 오빠, 내가 이걸 뽑았나 봐."
"장난 아니네."
"기억이 안 나. 뽑고 싶긴 했는데, 내가 뽑은 순간이 기억에 없어."
"일단, 일어날 수 있겠어?"
"응. 숙소로 가자. 쉬고 싶어."
숙소에 들어가면서도 얼떨떨, 숙소에 들어가서도 얼떨떨, 씻으면서도 얼떨떨했다. 다행히 금세 깨어났고, 지금까지도 멀쩡한 상태라 별일 아니겠거니 했지만, 나의 상상력은 또 가동되기 시작했다. 운전하다가 기절하면 어떡하지? 걷다가 그냥 기절해 버리면 어떡해? 난 오늘 왜 기절한 거지? 이럴 땐 무슨 검사를 받아 봐야 하는 걸까. 가장 그럴듯하게 추측해 보건대, 인형 뽑기 샵에서 공황이 왔던 것이 아닌가 싶다. 들어가자마자 느껴졌던 압도적인 노래의 음량, 실내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으니 그럴 만하지 않았나. 게다가 남편 인형 뽑는 걸 구경하면서 느꼈던 답답함, 울렁거림, 어지러움. 그때 바로 매장을 나왔더라면 기절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정신건강의학과 진료가 있는 날 선생님께 얘기드려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취침 전 약을 챙겨 먹었다.
자려고 누워 있으면서도 계속 인형 뽑기 매장에서 있었던 일들이 아른거렸다. 그러다 약 기운이 올라 잠에 들었던 것 같다. 서울 여행 중에 느닷없이 일어난 하나의 사건, 그리고 그날 밤, 심난했던 마음으로 잠들었던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