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고 싶지만 마주한다

11 나의 가짜 워킹홀리데이

by 잉플

정신이 건강한 사람들도 살다 보면 도망치고 싶은 순간들이 있을까. 근무 한 달 차, 예상하지 못했던 면담이 잡혔다. 근무 3주에서 4주 차에 접어드는 직원들이 형식적으로 갖는 면담이었는데, 전반적인 근무 평가와 일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이 있는지를 묻고 답하는 시간이었다. 매니저는 우선적으로 지난 한 달 동안의 내 업무량에 대한 평가를 하기 시작했다. 남들보다 느리지만 오차가 없는 입고 상태, 소비기한을 착실히 확인하는 것은 좋지만 오차가 없을 수준으로 꼼꼼한 탓인지 속도가 느린 게 아쉽다는 평이었다. 물건을 입고할 땐 동료들이 동시에 입고 업무를 보기 때문에 내가 느리다는 건 누군가가 나 대신 하나라도 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내가 팀원들에게 민폐가 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졌다.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둬야 하는 건가 싶을 만큼 부담이 느껴졌고, 그 부담은 이내 압박감으로까지 다가왔다.


"하다 보면 속도는 늘 수밖에 없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속도가 안 느는 사람은 제가 본 적이 없거든요. 지금도 잘하고는 계시는데, 조금 더 빠르게 움직여서 입고량이 늘어나면 좋겠네요."

"지금 제 속도가 남들보다 얼마나 느린 건가요?"


매니저는 이런저런 통계가 나와 있는 엑셀표를 스크롤하면서 말했다.


"지금 보면... 이 분은 일한 지 4개월쯤 된 분인데, 이 분이랑 2배 정도 차이가 나요. 근데 이 분은 워낙 빠른 분이기도 해서 이 정도까진 아니어도 지금보다 1.5배까지는 늘려 주셔야 할 거 같은데, 하실 수 있겠죠?"


가슴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와, 나 때문에 일을 더 하고 있는 사람이 이 사람인 건가. 머릿속엔 온통 그런 생각뿐이었다. 앞으로 내 속도가 늘긴 할까? 매니저한테 할 수 있다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할 수 있다는 말이 도저히 나오질 않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기도 힘들 만큼 면담에서의 압박감이 마치 직전에 그만둔 직장에서 느꼈던 막막함처럼 막연했다. 사람을 상대할 일이 없고, 오로지 주어진 일만 몸으로 하면 되는 일이라 이렇게 막막한 상황이 올 거라는 예상을 전혀 못 했다. 머리가 새하얘지는 사이에 매니저가 어떤 얘기를 하는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달이 님?"

"아, 네."

"지금처럼만 쭉 하다 보면 나아질 거예요."


내가 당황한 티가 난 건지 어쩐 건지 매니저는 갑자기 부드러운 어조로 격려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고강도 육체노동인 탓에 사람들이 업무를 지원했다가도 하루이틀 만에도 그만두는 분위기라 혹여나 내가 그런 생각을 할까 봐서 갑자기 격려의 말을 쏟아내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일하는 한 달 사이에도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 다섯 명을 넘겼다. 일 배우러 와서 경력자들이 하루이틀 알려주고 나면 이후에 갑자기 사라지던 사람들. 나도 이제 한 달을 채우고 있지만, 어쩌면 그게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다. 아니다 싶을 때 빨리 돌아서 버리는 거 말이다. 가끔 냉동창고에서 입고 업무를 보다 보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관둬야 하나, 너무 춥다. 너무 힘들다. 너무 지친다. 어지럽다. 이런 생각. 근데 또 하다 보면 시간이 가서 퇴근 시간이 다가온다. 그렇게 퇴근하고 나면 조금 뿌듯한 마음을 가지게 되고, 다음 날 출근하고, 그러다 보니 한 달.


"노력은 해 보겠는데요. 솔직히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네? 어떤 부분이요?"

"지금도 저는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2배가 뒤처질 정도면요. 하다 보면 어지럽기도 하고, 중간중간 일이 헷갈려서 멈칫대는 것도 있고요. 다음에 또 면담하나요?"

"중간에 또 할 수도 있어요."

"정말 노력은 해 볼 거예요. 근데 만약에 다음 면담 때도 남들보다 뒤처지고 있으면 제가 그만둘게요."

"네?"

"너무 부담이 돼요."

"어떤 게 부담이 되는 거예요?"

"제가 느리면 다른 사람이 일을 더 해야 하는 거고, 피해를 주고 있는 거잖아요. 제 성향 탓인 것 같은데... 그걸 알면서 이곳에서 일하는 게 마음이 너무 불편할 것 같아요."

"달이 님 지금 잘하고 있어요. 분명히 늘 거예요."


마지막까지 격려로 끝난 대화였다. 난 사실 저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냥 지금 당장 일을 그만두고 싶기도 했다. 난 이 일이 그저 몸만 부지런하면 될 일이라 생각했고, 업무 자체는 단순한 편이었기 때문에 내가 잘하고 못하고 할 것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지원했던 일이었는데, 남들보다 느리다니. 팀원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었다니. 이곳에서도 제 할 일을 잘 해내고 있지 못하는 나인 것 같아서 오늘도 스스로가 쓸모없게 느껴졌다.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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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찾아온 출근 시간. 어제의 면담이 자꾸만 머리에 남아 잠을 설쳤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가는 출근길은 아직 어두웠고, 추웠고, 밤 사이 내린 눈에 길바닥이 포삭거렸다.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노래 가사는 지금 내 감정과는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기분이 너무 이질적이라 급하게 노래를 바꿔 틀고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 거야-

가파른 이 길을 좀 봐-


이제야 가사가 내 마음 같았다. 20분 가까이를 걸어온 근무지 앞에서 피우는 담배 하나. 출근 시간까지 12분 정도 남아 있는 무렵이었다. 아침부터, 아니 새벽부터 기분이 무척이나 씁쓸했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잘해야 할 텐데. 나는 이 부담감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입 다물고 어제 말한 대로 노력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동생은 나에게 어제 면담의 내용을 듣고는, 그건 그냥 뻔하고 형식적인 면담 내용일 뿐이라고 했다. 매니저 입장에서 직원에게 더 노력해 주세요, 잘하고 있어요 하는 건 너무나도 형식적인 대사라고. 그리고 그 면담 또한 너무나도 형식적인 수순이었을 것이라고, 너무 부담 가질 필요도 없고 심지어는 남들에게 피해가 될까 봐 노력해도 안 되면 그만둔다고 말한 것조차 내게 너무 오버한 것 아니냐고 했다. 매니저가 분명 당황했을 거라고 했다. 보통은 그냥 더 노력하겠다고 하며 좋게 좋게 끝나는 면담이 매니저 입장에서도 사뭇 진지한 면담이 되어 버린 게, 동생의 이야기를 듣고 매니저가 당황했을 수도 있었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난 정말 팀원들에게 피해가 되는 거라면 그만두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말한 거였고, 그런 이야기를 매니저가 미리 알고 있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했었는데. 매니저는 언제라도 근무 평가를 할 수 있으니까, 내 속도가 나아지지 않으면 자진해서 그만둘 것을 미리 알 수 있으니까 좋은 거 아닌가? 오히려 미리 알려 주지도 않고 갑자기 그만둬 버리는 게 더 당황스러운 일 아니야?


이제는 익숙해진 근무 준비. 마음은 도망치고 싶지만 마주한다. 오늘의 현실을 마주한다. 나는 일을 하러 왔고, 이곳에서 약속한 나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환복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내가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지지만, 어제의 그 기분이 여태 유지되고 있지만, 오늘도 꾸역꾸역 살고 있다. 환복을 마친 후 냉동창고로 향했다. 정말로,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뒤로하고 나를 마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