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나의 가짜 워킹홀리데이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깼다. 일어나기로 했던 시간보다 두 시간을 덜 자고 깼는데, 다시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자고 있는 남편이 깰까 작은 발걸음으로 욕실로 향했다. 가장 먼저 개운하게 양치를 하고 싶었다. 최근에 우연히 바꾸게 된 치약이 최근 나의 하루 중 작게나마 기분 좋은 상쾌함을 가져다주는 요소였다. 정말이지 적당한 민트향과 향긋함이 요즘은 이를 닦는 일이 즐거울 지경이었다. 이를 닦으며 오늘 나에게 펼쳐질 하루를 예상하다가 불현듯 하나의 바람이 생겼고, 그건 오늘이 그냥 그저 그런 날이길 바라는 일이었다. 그리 행복하지도, 그리 불행하지도 않은 날이길 바랐다. 잠을 적게 자고 일어난 날은 높은 확률로 내 신경이 예민했고, 때문에 작은 일이나 누군가의 말에도 자극을 받기가 쉬웠다. 그래서 지금 다시 누워 일어나야 할 시간까지 조금이라도 더 자는 게 맞다 싶었지만, 어떡해, 다시 잠이 안 오는 걸.
언젠가는 내가 크게 행복한 사람이길 소망한 적도 있었다. 대운을 맞아 하고 있는 일이 술술 풀렸으면 좋겠다든지, 로또에 당첨되어 금전적으로라도 여유를 갖게 된다든지 하는 많은 사람들이 소망할 만한 기대감이었다. 살아가면서 무언가를 소망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잘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일 같았다. 누군가가 그랬다. 강해서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았기에 강한 것이라고. 소망하는 것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곧 살아남아 있다는 의미가 되고, 그것은 곧 강하다는 걸 뜻하는 걸까? 나는 오늘이 그냥 그저 그런 날이길 소망하고 있으니, 이 바람도 하나의 소망으로 쳐 주려나?
이런저런 생각으로 새벽엔 거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휴대폰의 시계는 3시 40분임을 알려 주는 시간이었다. 눈을 뜬 지 벌써 한 시간이 지나 있는 걸 봐서는 오늘 하루 시간이 참 빠를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시간은 절대적이겠지만, 나에게 시간은 늘 상대적으로 흘렀다. 어떤 날은 참 빨랐고, 어떤 날은 참 느렸다. 결국 시간은 항상 빠르다는 인식을 하면서 살고 있지만, 내가 고통스러운 시간은 늘 느리게만 느껴졌었다. 지금은 내가 고통받지 않는 시간, 그것은 참 빨랐다. 곧 출근을 앞둔 상황임에도 그다지 마음이 초조하거나 싫지 않았다. 내일이 휴무이기 때문일까. 마치 일반 직장인들의 금요일처럼 말이다. 목요일의 시간보다 가볍고 경쾌한 금요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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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대로 그저 그런 날이 흘러가는가 싶었다. 오늘따라 하루 종일 눈꺼풀이 무겁고, 피곤하긴 했지만 별일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짧게라도 낮잠을 자는 습관이 생겨 오늘도 낮잠을 잘 참으로 수면 안대를 끼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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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한 안갯속 정처 없이 길을 거닌다. 숲길의 길이 어디로 나 있는지, 어디로 향하는 길인지 알 수 없었다. 해가 있는 시간이었지만, 울창한 숲의 나무들 덕분에 해가 가려진 정도가 심해 쌀쌀하게 느껴지는 날씨가 음산하게 느껴졌다. 빛이 아예 들지 않는 곳을 지날 땐 하얀색 깃발을 볼 수 있었다. 마치 누군가 이곳은 해가 들지 않는다고 표시해 둔 것처럼 정말 빛이 하나 들지 않는 곳에만 하얀색 깃발이 있었다. 왜인지 하얀 깃발을 지날 때는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무서웠다.
이건 꿈이었다. 나는 자각몽을 꾸는 중이었다. 꿈속에선 내내 길을 헤맸다. 소중한 누군가를 잃어버린 상황이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른 채 계속해서 반복되는 하얀 깃발, 울창한 숲길, 어둑한 그림자가 지는 길을 뛰다시피 걸어 다녔다. 빠르게 뛰는 심장, 급해지는 마음, 애가 닳는 기분이었다. 찾아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누군지도 모르는 나에게 소중한 사람을 찾아다니는 꿈. 꿈인 줄 알면서도 마음이 초조했다. 어디서 들은 대로라면 꿈인 것을 눈치챘다는 걸 꿈속에서 티 내면 안 된다고 했다. 나는 그런 이성적인 생각까지 하며 이 꿈이 꿈인 줄 알면서도 꿈이 아닌 것처럼 애타게 그 사람을 찾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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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눈을 떠서 시간을 확인했을 땐, 잠들려고 했던 시간으로부터 30분이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겨우 30분을 자고 일어나면서 이런 꿈을 꾼 거야. 잠에서 깨서도 여전히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 같았다. 수면 안대의 온열 기능이 아직 다 사라지지도 않았다. 아직 따뜻한 일회용 온열 안대를 버릴까 하다가 그냥 계속 착용하고 누워 있기로 했다. 목이 말랐지만, 물을 마시러 가기가 귀찮았다. 누워서 생각했다. 깜깜한 시야 속에서 생각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잠들기 전까지는 그냥, 그저 그런 하루가 지나가나 싶었다. 꿈이 너무 기분 나쁘지만, 꿈은 꿈일 뿐이니 아직 내 하루는 그저 그런 하루인 걸까.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이토록 기분이 안 좋고 애가 타는 일이라는 걸 오늘 나의 꿈에서 경험했다. 그것이 자각몽이었는데도 말이다.
어쩌면 꿈 내용은 나빴지만, 오히려 좋은 경험이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 경험은 꿈이라 천만다행이고, 나를 소중하게 여겨 주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이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하겠구나 싶었다.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함께. 그래, 이 정도면 오늘 하루는 내가 원하던 대로 그냥 그저 그런 하루였다고 할 수 있겠다. 오늘 하루 아무 일이 없었고, 여전히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