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루에 한 걸음
대학생 시절, MBTI 성격유형 검사를 했을 때 나는 ENFP,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백여 명의 학생이 모인 강의실에서 강사 선생님은 "왼손으로 자신의 이름을 써보라"고 했다. 익숙하지 않은 왼손으로 한 자 한 자 힘을 줘가며 또박또박 이름을 써 내려갔다. 마지막 글자인 '정'을 쓰는 데 애를 먹었지만, 무사히 써낸 뒤에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주위에서 이상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유도 모른 채 당황하던 나는, 강사님이 내 종이를 다른 학생들에게 보여주는 순간 더더욱 얼굴이 붉어졌다. 나를 포함한 세 명이 글자를 거꾸로 쓴 것이었다.
그날 두 번째 활동은 조별 여행 계획 짜기였다. 같은 조에는 나처럼 외향적인 성향의 학생들이 모였고, 우리 열 명도 채 되지 않는 인원은 교실을 떠나갈 듯 시끌벅적했다. 준비물도 계획도 없이 "그날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나자!"는 결론을 내릴 만큼 자유로웠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때와는 다르다.
공부방 사업을 하며 기획과 운영을 반복했고, 엄마가 되면서 삶의 우선순위가 달라졌다. 아이를 키우며 일과 육아를 병행하다 보니, 잠깐의 자유 시간에는 사람들을 만나기보다 혼자 조용히 보내는 걸 더 선호하게 되었다. 자연스레 성격도 내향적으로 변했다.
내 딸은 태어날 때부터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지만, 성격은 부끄러움이 많고 낯가림이 심하다. 새로운 환경에서 편안함을 느끼기까지 시간이 꽤 걸리는 아이. 기질상 나와 더 닮은 듯하다.
남편은 정반대다.
극 E(극단적인 외향형) 성향을 가진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이야기하고, 무대에 오르는 걸 즐긴다.
한국에서는 전국노래자랑 인기상 수상 경력 두 번, 심지어 아침마당에는 친정엄마와 세 번이나 출연한 적도 있다.
우리는 터키의 한 리조트에서 가족 휴가를 보냈다. 딸과 나는 조용히 책을 읽고 수영을 하며 휴식을 즐겼고, 남편은 외국인들과 어울리고 밤마다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다.
셋째 날 밤, 남편은 섭섭한 마음을 드러냈다.
“나만 혼자인 기분이야. 다른 사람들은 가족이랑 다 어울리는데…”
나도 서운했다.
“나도 노력하고 있어. 단지 친해지는 속도가 다를 뿐이야. 이제 막 이틀 지났잖아. 나랑 딸에게 시간을 좀 더 줘.”
내향적인 나와 딸이 외향적인 남편 눈에는 답답하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도, 딸도 우리가 공간과 사람들에게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한 거다.
나는 평생 대구의 한 시골 마을에서 자랐다. 동네 어귀를 지나다 보면 꼭 인사를 해야 하고, 어딜 가나 아는 얼굴이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낯선 나라, 영국에 와 있다.
여기서 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
40대 후반의 아시아 여성이, 이미 친구가 정해져 있는 그들의 삶 속에 끼어들 수 있을까?
내가 사는 영국 마을에서는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는다. 모르는 사람과 웃으며 "Goodmorning!" 인사를 나누며 스몰토크를 하는 것이 나에겐 여전히 낯설다.
그렇지만 영국인들에게 아시아인들은 인사를 잘하지 않는다는 선입견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내가 그들에게 먼저 인사해 보기로.
"Good morning!"
"오늘 날씨 너무 좋죠?"
"비가 너무 많이 왔네요."
"날씨가 요즘 이상해요."
"오늘은 산책하기 딱 좋은 날이에요."
나는 거의 기상캐스터처럼 날씨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한다.
소심한 내향인인 내가, 영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친다.
한마디 인사, 한 번의 눈 맞춤, 짧은 스몰토크—그 모든 것이 내겐 도전이자 진심 어린 시도다. 내 속도대로 천천히 한 발씩 나아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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