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물건의 자리는 어디에 있을까?
터키에서 2주간의 휴가를 마치고 다시 영국 집으로 돌아왔다.
시부모님께서는 우리가 없는 동안 조용한 일상을 보내신 듯했다. 두 분만 계실 때는 아무리 큰 집이라도 어지르는 사람이 없으니, 집 안은 늘 정돈되어 있었다.
휴가의 여운도 잠시, 다시 이 집의 ‘룰’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시어머니는 정리정돈과 계획된 일상을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이다. 본인은 잘 인식하지 못하실 수도 있지만, 시어머니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은 안다.
물건은 제자리에 있어야 마음이 편하시고, 일주일 식단은 미리 정해져 있어야 하고, 그 계획에 따라 미리 적어둔 리스트를 보며 매주 수요일 장을 보신다. 만약 우리가 요리를 하면서 어떤 재료를 다 써버려서 어머니께서 필요할 때 없으면... 꽤 스트레스를 받으신다.
그래서 냉장고 옆에 작은 화이트보드가 하나 붙었다.
이 집의 새로운 규칙: 재료를 다 쓰면 꼭 메모하기.
오이, 버섯… 오늘도 칠판에 서명을 남기듯 쇼핑 리스트를 적는다.
식사에 대한 어머니의 루틴은 나름의 규칙과 계획이 있다.
월요일과 수요일은 샐러드나 수프처럼 칼로리가 적은 식사,
금요일엔 친구들과 펍에서 점심을 드시니 저녁은 간단한 간식,
일요일은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영국식 로스트 디너.
하지만 다섯 식구의 입맛과 일정까지 모두 고려하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으며, 우리 세 명은 이 루틴으로 먹는 게 많이 답답하고 즐겁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제안드렸다.
“어머니, 우리... 주 4일은 따로, 주 3일은 함께 식사하면 어떨까요?”
속마음을 알 순 없었지만, 어머니는 “그래보자” 하셨다.
그날 이후로 화·목·일만 함께 저녁을 먹고, 월·수·금·토는 우리 가족이 따로 식사하게 됐다.
눈치 안 보고 요리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편한 일인가!
이제는 김치 냄새 걱정도, 매운 고추장 눈치도 필요 없다.
오늘 저녁은 돼지고기 듬뿍 넣은 김치찌개다.
앗싸!
식사만큼이나 또 하나의 경계가 드러난 곳은 바로 세탁기였다.
예전부터 우리 집에서 빨래는 남편 담당이었다.
그의 세탁 방식은 단순하고 거침없다. 흰 옷, 검은 옷 따위 구분하지 않고 세탁기에 한가득 돌린다.
나는 성격이 그리 까다롭지 않아 그냥 맡겨두는 편이다.
시어머니는 옷을 색깔별로 구별해 세탁을 하셨고, 바지, 티셔츠뿐만 아니라 양말까지 꼭 다림질을 해서 구김이 없는 상태를 좋아하셨다. 어머니께 빨래에 특별한 규칙이 있는지 여쭸더니,
크게는 없다면서도 세제 넣는 순서, 세탁 시 유의사항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설명해 주셨다.
그리하여, 세탁기 위에는 포스트잇 메모가 가득 붙었다.
어두운 것과 밝은 옷으로 나눠 빨래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시부모님의 빨랫감도 함께 넣어하다 보니 빨래는 내 차지가 되었다.
일상이 조금씩 안정되어 갈 무렵,
4개월 전 한국에서 우체국 EMS로 보냈던 10박스의 짐이 도착했다.
12년 결혼 생활의 흔적들, 잘 쓰던 물건들
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물건들이어서 당근마켓 무료 나눔으로 70여 품목들을 정리했다.
장난감, 아동책, 주방용품, 접시, 찻잔, 책상, 소파…
특히 인근 대학에 다니는 외국인 유학생들이 많이 다녀갔다.
몽골, 필리핀, 파키스탄 학생들.
외국인 학생들이 영국산 접시와 티 팟들, 머그잔들을 가지고 가면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또 다른 한 분은 식당을 오픈하는데, 주방도구들이 너무 필요했다며,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 채택된 커피 쿠폰을 나에게 문자로 보내주셨다.
쓰레기봉투에 그냥 쓸어 담아서 버리고 싶은 맘이 왜 없었겠는가?
나에게 양심이 허락하질 않아서 새벽까지 쓸만한 물건을 닦아 사진을 찍고 당근에 무료 나눔을 했었다.
나의 수고에 버려질 뻔 한 물건들이 다른 분들에게 가서 또 쓰임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피곤했지만, 딸아이와 함께 지구를 위해 좋은 일을 하니 더 의미가 있었다. 내가 딸아이에게 어떻게 살아라 라며 말해주지 않아도 충분히 이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도착한 10박스 앞에서 다시 한숨이 나왔다.
생각보다 집 안엔 이 짐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특히 시어머니의 주방은 이미 깔끔하게 정돈되어 꽉 차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압력밥솥, 프라이팬, 머그잔, 예쁜 접시들…
그 모든 물건은 창고로 직행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국에서 더 정리해 올걸...’
그래도 언젠가는 이 물건들도 다시 빛을 보겠지.
“안녕, 나중에 꼭 다시 만나자.”
조금은 아쉬운 인사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