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으시면 안 됩니다!
긴장보다 비싼 응시료
영국에서 학위를 받은 적이 없는 나는 배우자 비자 신청을 위해 영어 능력 평가 시험인 IELTS Life Skills 성적이 필요했다. 이 시험은 듣기와 말하기로만 평가되며, 같은 날 시험을 치는 응시자가 한 조가 되어 시험관이 주는 질문들을 약 20분간 주고받으며 대화하는 형식이다. 시험은 정보 교환, 주제 토론, 계획 수립, 듣기 평가로 구성되며, 레벨은 세 수준으로 나뉜다.
응시료가 20만 원이 넘는 걸 보고, 비용도 아낄 겸 영주권 신청 시에도 쓸 수 있는 가장 높은 레벨인 B1으로 시험을 치르기로 했다. 결과는 점수가 아닌 Pass 또는 Fail로 판정되며, 자연스럽고 효과적인 영어 의사소통 능력을 보는 시험이다.
집 근처에는 시험장이 없어 1시간 정도 운전해 버밍엄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시험을 치는 데다 떨어지면 돈이 아까울 것 같아 긴장감이 잔뜩 들었다. 그런데 남편은 시험장 근처에 맛있는 케밥집이 있다며, 내가 시험을 보는 동안 점심을 먹을 생각에 한껏 들떠 있었다.
웃으시면 안 됩니다!
시험장에 들어가니 공항 검색대를 방불케 하는 보안 검사를 받았다. 소지품은 물론이고, 안경과 신발까지 모두 벗어야 했으며, 물을 담아 간 물병까지 샅샅이 검사당했다.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안경을 벗고 카메라를 보라는 안내에 따라 사진을 찍는데, 셔터가 눌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때 감독관이 말했다.
“웃으시면 안 됩니다.”
나는 멋쩍은 미소로 사과했다.
“카메라 앞이라 나도 모르게 웃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네요… 죄송합니다.”
내 말에 주변 감독관들이 미소를 지었다.
시험장 복도에서 함께 시험을 치는 응시자와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예전에 블로그에서 한국에서 시험 본 분들의 경험담을 읽은 기억이 떠올랐다. “상대방의 억양에 익숙해지기 위해 대기 시간에 웃으며 인사하고 가볍게 대화해 보세요.”라고 했던 조언이 생각나, 나도 웃으며 "Hi~"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복도를 지나던 감독관이 곧장 다가와 말했다.
“서로 말하시면 안 됩니다.”
영어 시험이 이렇게까지 삼엄할 필요가 있나? 순간 짜증이 확 올라왔다.
시험장에 들어서니, 카메라 한 대와 녹음기 두 대, 그리고 감독관 한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감독관은 내 이름을 확인하고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평소에는 영어를 가르치고 시험 문제를 만들고, 시험 감독도 해왔던 내가 직접 학생이 되어 시험을 치르게 되니 입이 바짝 마르고 배도 살살 아픈 느낌이었다.
내 파트너는 루마니아 출신이었다. 영국에서 10년 넘게 살았지만, 역시 배우자 비자를 위해 시험을 치러 왔다고 했다. 이 시험은 파트너와의 팀워크가 중요한 시험이다. 감독관이 주제를 주면 한 사람이 먼저 말하고, 상대는 그것에 대해 세 가지 질문을 던지며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 어느 한 쪽이 너무 많이 말하거나, 질문이 없이 일방적인 대화가 되면 감점 요인이 된다.
다행히 우리는 서로 눈치를 보며 질문과 대답을 자연스럽게 주고받았고, 약 20분간 비교적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시험을 마쳤다. 시험을 준비하면서, 예상 질문들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집의 스타일은?
내 취미는 무엇이고, 왜 그것을 좋아하는가?
지금까지 여행한 나라 중 가장 추천하고 싶은 곳은?
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는 무엇인가?
그 질문들을 준비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상의 숨 가쁜 하루하루를 살아가다 보면, 나는 나 자신에게 이런 질문들을 던져본 적이 거의 없었다.
나는 무엇을 좋아할까?
내가 진짜 좋아하는 취미가 있었던가?
나는 지금까지 무엇에 열정을 다했을까?
생각해보면, 나는 늘 ‘열심히’ 살았다.
열심히 공부했고, 졸업해서 열심히 직장 생활을 하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했고, 육아와 일을 병행하며 또 열심히 살아왔다.
그 모든 시간 속에서 ‘내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모두가 열심히 사니까, 나도 의심 없이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하지만 이 시험을 준비하며 마주한 수많은 질문들 앞에서, 처음으로 내 인생에 내가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는 다르게 살고 싶다.
50대를 앞두고 맞이하는 제2막의 인생에서,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진심으로 해보고 싶은지,
그 질문들에 진지하게 답하며 살아가고 싶다.
이제야 진짜 나에게 묻는다.
“너는 무엇을 좋아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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