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후반, 나는 영국 남자와 약혼을 했다.
약혼 비자 발급이 나의 첫 번째 서류 준비 과정이었다. 데이트할 때의 SNS 메시지, 이메일, 사진 등을 붙여 관계를 증빙해야 하는 것이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사적인 부분을 공개해 우리 관계를 인정받아야 하는 과정이 불편했다. 결혼식을 하기 위해 영국으로 입국했을 때, 출입국 심사관이 나에게 사적인 질문들을 물었다.
언제부터 데이트했나요? 어디에서 만났어요?
결혼식 이후에는 어디에서 살 계획인가요?
그 당시에는 그런 질문들이 불편했지만, 만난 지 몇 년 안 됐으니 우리의 관계를 의심할 수도 있지라는 생각을 했다.
비자 신청, 끝없는 증명
영국 남자와 데이트 포함 결혼 생활까지 12년을 알고 지냈는데, 우리의 관계를 증빙하는 자료부터 재정, 영어 실력, 결핵 검사… 참 증명할 자료가 다양하다.
비자 신청비, 건강보험료, 번역 공증비, 급행 추가비 등등 비자 신청은 시간과 돈이 많이 필요하다.
대구에 사는 우리는 건강검진도, 비자 서류 접수도 모두 서울로 가서 해야 했다.
일반으로 접수할 경우 6개월에서 1년 정도 걸린다고 해서 우리는 급행으로 접수를 했고, 4주 안에 결과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우리 가족에게 한국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은 한 달이었다. 비자가 좀 더 빨리 나온다면 다 같이 영국으로 들어갈 수 있고, 9월에 나온다면 학교 개학에 맞춰 남편과 딸은 먼저 들어가야 했다.
남편에게 1달의 휴가를 주기로 했다. 한국보다 동남아시아 여행을 더 좋아하기도 하고, 1년 동안 교육, 학교 아이들, 행정 등 초임 교사로서 적응하느라 긴장하고 애쓴 시간에 대한 보상을 주고 싶었다.
일단 남편이 태국으로 떠나고 나니 딸아이와 내가 친정집에 있는 게 훨씬 덜 부담스러웠다.
부모님과 농사, 끝나지 않는 갈등
외동아들로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남편은 친정 부모님의 무관심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저렇게 휘어진 허리와 허약한 몸으로 농사일을 계속하시는 부모님의 정신력을 긍정적으로 보기가 힘들다고 했다.
나도 평생 부모님을 이해하기 힘든데, 나와 만나서 가족을 이룬 남편은 얼마나 더 힘들겠는가. 결론은 우리의 잣대로 부모님을 평가하지 말자. 그리고 우리는 부모님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남편이 태국을 가기 전 온 가족이 기장의 아난티 풀빌라로 여행을 떠났다. 넓은 단독 빌라에는 수영장이 딸려 있었고, 바로 앞에는 아름다운 바다 전망이 펼쳐졌다. 새벽 일찍 일어나신 부모님, 언니와 함께 산책을 나갔다. 이른 아침에 뿌옇게 낀 안개로 바다는 더욱 신비롭게 보였다.
언니가 먼저 부모님께 말을 건넸다.
“아부지, 이제 연세도 있으시고 농사일은 정말 몸이 허락하는 정도로만 하셨으면 해요. 엄마가 체력이 많이 약해지셔서 이제 농사일을 하면 허리가 완전히 고장 날 것 같아요.”
“나도 안다. 알어. 하지만 다른 사람들 농사로 돈 버는 거 보니, 나도 멈출 수가 없어. 채소 씨앗 뿌려놓으면 몇 주만 지나면 얼마나 예쁘게 자라는데. 그게 다 돈이야.”
“근데 건강을 해치고 있잖아요. 이제 돈 안 버셔도 충분하시잖아요. 엄마는 운동하고 놀러 다니고 싶으신데요. 평생 일하셨으니, 이제는 엄마도 본인이 하고 싶으신 거 하실 수 있게 해 주세요.”
“농사일은 내가 다 하지. 너희 엄마는 아무것도 안 해.”
역정을 내시는 아버지 옆에서, 평생 고맙다는 소리 한 번 못 들으신 어머니가 너무 안쓰러웠다.
제주도, 또 다른 만남
온 가족 여행을 다녀온 후, 딸아이와 제주도 여행을 가게 되었다. 딸은 태어난 후 6개월쯤 제주도를 가보고 이번이 두 번째 여행이었다. 언니와 엄마, 조카가 3일 뒤에 합류할 예정이라 딸아이와 버스를 타고 자유여행으로 제주도를 둘러볼 계획이었다.
제주도 역시 8월은 대구만큼이나 습하고 더웠다. 제주도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후배를 만나 점심을 먹기로 했다. 같이 직장 생활을 한 녀석인데,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혼자 산 중턱에서 조용히 살고 있었다.
사람 만날 일이 많지 않아 오랜만에 마주 보고 대화하는 게 어색하다고 했다. 10대에 열심히 공부해 연세대학교라는 좋은 대학을 나와 시민단체에서 청소년을 위한 의미 있는 사업들을 하다, 모든 걸 정리하고 제주도에서 조용히 농사일을 하며 지내는 후배에게 물었다.
“외롭지 않니?”
“아뇨. 괜찮아요. 사람이 그리우면 시내에 나가서 쇼핑도 하고 그래요. 농사일이 제 성격에 딱 맞는 일인 것 같아요. 열심히 하는 만큼 결과가 나오니까요.”
“그래. 우리 아빠도 농사일이 천직이신 것 같아.”
“건강하고, 가끔 연락하며 지내자.”
친구는 딸아이에게 귤밭에서 일하고 받은 일당을 용돈으로 주었다.
“아니야. 괜찮아. 너 고생하면서 번 돈인데… 내가 마음이 너무 불편해.”
“아니에요. 또 언제 볼지 모르니, 볼 수 있을 때 주면 좋죠.”
후배 녀석의 마음이 느껴져 가슴이 뜨거워졌다.
농사일이 천직인 두 사람.
나의 아버지와 후배. 땅을 일구느라 굵어진 손가락과 거칠어진 손등을 보니, 그들의 노고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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