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이 생각나는 벤치

건강하세요!

by 잉글맘

한국에 계신 아버지의 생신이 다가오고 있다.
가족 단톡방에서는 여느 해처럼 우리 집 대장인 언니가 “어디서 밥 먹을까?” 하고 묻는다.


어릴 적 아버지 생신날이면, 아침 식사를 하러 오시는 동네 어르신들을 대접하느라 국을 뜨고 반찬을 나르며 “많이 드세요”를 반복하던 날들이 떠오른다.
정작 주인공인 아버지는 아침부터 비싼 위스키 병을 열어 어르신들께 자랑하셨다.
브랜드도, 가격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 시절 그 동네에서는 ‘위스키’라는 말 하나로도 충분히 특별했고,

어르신들은 한 잔 털어 넣은 뒤 국에 밥을 말아 김치를 올려 안주처럼 드셨다.


시간이 지나면서, 집에서 직접 음식을 해 대접하던 문화는 어느새 근처 식당으로 옮겨갔다.
오리 불고기 집, 삼겹살 식당.
식당 봉고차와 가족들의 차로 어르신들을 모셔오고,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고기를 뒤집으며 또다시 “많이 드세요”라는 인사를 건넸다.
어르신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전투적으로 드시기 시작했고, 영국인 남편은 빈 잔을 찾아다니며 소주를 채워드렸다. 고기와 술로 배를 채운 뒤에는 엄마가 정성껏 준비해 온 과일과 떡이 테이블에 올랐다.

이미 더는 못 드실 것 같은 표정이지만, 어르신들은 또다시 천천히 손을 뻗어 드셨다.

그리고 마지막.
우리 가족이 준비한 케이크에 초를 켜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축하가 끝나면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봉고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모든 것이 매년 아버지의 생신을 이루던 우리 집만의 풍경이었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로 이런 모습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이제는 가족끼리 조용히 모여 식사하고, 커피 한 잔 나눈 뒤 3시간쯤 지나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


아버지는 올해 79세.
내년이면 팔순이다.
늘 “나는 여든 넘으면 죽어도 돼”라고 말버릇처럼 말하시던 분.
엄마에게 고맙다는 말도, 고생했다는 말도 쉽게 하지 않는 무뚝뚝한 분.
사랑한다는 말은 평생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분.


연세가 드신 부모님을 보면, 서로를 향한 마음이 없다면 남은 여생은 각자가 원하는 삶을 편하게 사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매일 얼굴을 맞대고 싸우다가도 그 속에서 쌓인 미운 정이 더 큰 관계라면…


외국에서 살다 보니 부모님이 더 늙지 않으셨으면, 건강하게 오래 살아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커진다.
자주 뵙지 못해 미안하고, 보고 싶고…


오늘 공원을 산책하다가 ‘노부부의 죽음을 기리는 벤치’를 보게 되었다.
서로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진 작은 금속 명판.
누군가의 사랑과 삶이 끝나고 난 뒤에도, 이렇게 한 자리에 조용히 남아 누군가를 머물게 하는 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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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모님 역시 서로의 생이 다하기 전,
조금 더 아껴주고, 조금 더 따뜻해지기를.
나는 그 벤치 앞에서 조용히 바람을 맞으며 마음속으로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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