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국인과 결혼해 한국에 살면서, 언젠가는 남편의 나라로 가서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늘 품고 지냈다. 딸아이가 커갈수록 우리 부부는 아이를 어디서 키우는 게 좋을지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정집은 차로 5분 거리.
언젠가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나는 부모님을 더 자주 찾아뵈려 노력했다.
남편과 나, 그리고 딸. 우리는 틈만 나면 친정집을 드나들었다.
어릴 적 우리 집은 이웃과 친척들이 사전 예고 없이 드나들던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른이 된 후 그런 방문이 누군가에겐 부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은 늘 말했다.
“부담이라니, 함께하는 시간이 더 행복할 거야.”
그리고 정말로… 부모님은 언제나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친정에 가면 엄마는 늘 먹을 것을 챙겨주셨다.
저녁을 먹고 왔다고 해도 뭐라도 가지고 나오셨다.
딸아이가 배가 불러도 “더 무라, 더 무라”
남편이 잘 먹기만 하면 흐뭇해하시다가도,
살이 찌면 또 “살쪘다”라고 말하는 우리 엄마.
엄마는 사실 문학을 좋아하던 감성적인 사람이었다.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시절 할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기란 쉽지 않았다.
고모의 소개로 아빠와 맞선을 보았고, 그 자리에서 아빠는 다정하지도, 매너도 좋지 않았다.
맞선 이후 우연히 같은 버스를 탔을 때조차 아빠는 본인 요금만 내고 먼저 올라갔다.
엄마는 그때 ‘이 사람은 아니다’라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아빠는 다시 엄마의 동네로 찾아왔다.
조금 더 신경 쓴 모습으로.
그리고는 할아버지께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결혼할 당시, 엄마는 아빠 얼굴을 제대로 바라볼 틈도 없이 혼례를 치렀다.
아빠는 책과는 거리가 먼 농사꾼이었고, 엄마의 감성과 독서 취미를 이해할 여유도 없었다.
그런 아빠와 살림을 하며 네 명의 아이를 키우고, 다음 날 새벽이면 다시 들로 나가야 했던 엄마.
엄마는 아이들만큼은 연필과 책을 놓지 않았으면 했다.
어떻게든 네 형제 모두 대학에 보냈고, 큰 입학금을 한꺼번에 준비해야 했을 텐데도 그 힘든 여정 속에서 자랑스러움이 더 컸을 것이다.
가끔 엄마의 굽은 등과 얇아진 다리를 보면 생각한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생겨났을까.
방학이면 10명이 넘는 사촌들이 우리 집에 몰려왔다.
우리 가족까지 합치면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의 밥을 챙기고, 세탁기가 없던 시절에는 냇가로 가 차가운 물에 손을 불어가며 빨래를 하던 엄마.
밤늦게까지 채소를 다듬어 새벽시장에 내다 팔고, 돌아와 다시 아침을 준비하고 도시락까지 싸주던 엄마.
그리고 또다시 아빠와 들로 나가 일해야 했던 그 시절의 엄마.
엄마는 정말 천하무적이었다.
슈퍼맨보다 더 강한 사람.
지난 주말, 폴란드 가족과 저녁을 함께 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그들은 영국에서 두 딸을 키우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야기했다.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친정엄마가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유모차를 밀며 카페와 슈퍼마켓을 다니셨다고.
그런 용감한 엄마가 올해 초 암 진단을 받았고,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다.
할머니와 많은 시간을 보냈던 그 집의 큰딸이 눈물을 흘렸다.
엄마 역시 눈물을 참기 어려운지 말을 잇다가 울컥했다.
요즘은 요리를 하다가도, 산책을 하다가도 엄마 생각이 나면 문득 눈물이 난다고 했다.
나도 함께 울었다.
오늘 나는 엄마와 17분 동안 통화를 했다.
통화를 끝내고 집 근처에 있는 공원으로 산책을 갔다.
내가 앉아 있던 벤치는 누군가의 엄마이자, 아내이자, 할머니였던 사람을 기리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그 벤치에 앉아, 나를 평생 사랑해 주는 우리 엄마를 오래 떠올리다 집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계신 우리 엄마.
상상도 못 할 만큼 많은 고생을 해내신 강한 엄마.
아프지 말고, 오래오래 살아 계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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