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비 하나 놓을 자리

by 잉글맘

한국에서 가져온 열 번째 박스 안에는 냄비와 후라이 팬,

그리고 추억이 깃든 접시들이 있었다.

버릴 수 없었던 것들.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

다행히 배편으로 오면서 깨지거나 부서진 것 없이 무사히 잘 도착했다.


문제는.

그걸 놓을 자리가 주방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영국 집 111번지의 모든 공간은 분리되어 있었지만, 아쉽게도 주방은 단 하나였다.

시어머니의 정리정돈된 살림과 한국에서 가져온 살림살이가 한 공간에 뒤엉퀴게 생겼다.

시어머니는 며칠 동안
수납장을 열었다 닫았다 하셨다.
이 칸에 넣었다가 다시 빼고,
저 칸으로 옮겼다가 고개를 저으셨다.


그 옆에서 남편은 온갖 해결책을 쏟아내고 있었다.


“여기 주방 벽을 쳐서 더 크게 만드는 건 어때?”
“전자레인지를 위로 올려서 수납장을 짜는 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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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기가 급격히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남편을 방으로 데려왔다.

“지금은 아이디어를 말할 때가 아니야.”

“어머니가 많이 힘들어 보여.”


그다음 날 아침, 어머니는 어두운 표정으로 주방으로 내려오셨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지금 있는 주방 도구들로도 충분할 것 같아요.
한국에서 가져온 것들은 일단 창고에 넣어두려고 해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했다.

“어머니 것, 같이 써도 될까요?”

“제 공간은 수납장 한 칸이면 충분할 것 같아요.”

그제야 시어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정말 그래도 되겠니?”
미안함이 섞인 표정이었다.


그럼요,라고 대답했다.

내가 한 발 물러서는 것으로
주방의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한국에서 애지중지 가져온 물건들아.
창고에서 잠시만 기다려라.

언젠가는,

다시 세상 빛을 보게 해 줄게.

주방은 조용해졌다.

그리고 나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공간에서는
시어머니의 룰을 따르기로.
적어도,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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