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한국에서 아주 짧게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갔다. 우리는 당시 메릴랜드 볼티모어로 갔었는데, 그때만 해도 동부, 특히 볼티모어는 한국인이 없었고 한인마트에 가려면 2시간 이상 차로 가야 했다. 아주 어렸을 때라 한국말도 못 하는데 영어라고 했겠나.
다행히 내가 미국이 갔을 무렵만 해도 LA폭동 이후로 아시안 아메리칸, 특히 한국계 미국인들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져있었다. 당시에 미국에서는 "더이상 color blind 인척 하지 말라"는 바람이 불면서 각자의 문화를 인정하고 뿌리를 인정하는 방법을 선택하기 시작했다.(melting pot)
이 방법은 공교육에서 더 심화됐는데, 학교가 끝나면 매일 담임선생님이 날 따로 불러서 도서관 어딘가에 짱 박혀 있는 백과사전을 꺼내놓곤 나한테 한국이란 나라를 가르쳐줬다.
"너희 조상들은 이런 걸 먹고 이런 곳에서 살아.."
물론 당시만 해도 있던 정보가 기껏해야 한국 전쟁 전후의 자료였으니 실제 도움이 되진 않았지만 내 뿌리에 대해서 인식할 수 있던 좋은 기회였다. 심지어 그 담임선생님은 백인에 비행기를 아예 타보지 못한 메릴랜드 토박이였는데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친구들과 사귀게 되고 한국어도 까먹고 한국이라는 개념 자체를 잃어버리고 집에서도 영어로 대화를 주로 하기 시작했다. 친구 한두 명의 부모님은 아시안인 나와 노는 걸 싫어했지만 엄청 심하게 맞거나 하진 않았다.
그리고 한국에 왔다. 한국에 오고 나니 정말 바보가 돼버렸다. 생긴 건 비슷했지만 한국말을 못 했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나와 비슷한 입장의 교포 여자애와만 대화할 수 있었다. 발음 이상하고 말 어버버거린다고 따돌림도 당해보고 차별도 많이 당했다. 그때부터 영어는 아예 쓰지 않으며 최대한 한국사람으로 지내려고 노력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차별당했으니까.
학교 선생님들도 원숭이한테 장난치듯이 말 걸고 뭐 반 친구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 딱 1-2년 정도 지나고 나니까 역시 내 몸에 김치 blood가 살아나더라. 지금 생각해보면 참 이상하지. 갓 이주해 온 생긴 것도 다른 사람에게 열려있던 나라 미국도 신기하고, 혀꼬여 있다고 외계인 취급하던 당시 한국도 참 이상.
드렁큰타이거 4집 '뿌리'
그러고 있었는데 드렁큰타이거가 중 2 때 '슬픈 기타 줄'이라는 곡을 갖고 나왔는데 중반부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난 또 이리 저리 갈데 없이 미국에선 노랭이 한국에선 교포 2세 날라리"
난 날라리도 아니었고 드렁큰타이가처럼 엄청난 편견을 이겨내진 않았지만 그래도 뭔가 고마웠다. 그때 처음으로 노래를 듣고 울어본 것 같다.
아무튼 그 후부터 드렁큰타이거 노래를 시작으로 CB Mass, 리쌍을 필두로 하는 Movement에 빠지기 시작했다. JK형은 1집 때 김진표한테 가사를 부탁하던 사람이었는데, 한국에서 가장 가사를 잘 쓰는 사람 중 한 명이 됐고 드렁큰 타이거는 전설이 됐다.
그런 드렁큰 타이거가 이제 없어진다네.(물론 이름만 없어지는 거겠지만) 이 빈자리는 누가 채우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