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예술 무용, 시간에 지지 않기 위해 말을 하고 기록하다
이 글을 쓰기 전 2개월 가까이 국내의 여러 지역을 다니며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과 만나고 관계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있습니다.
'무용하는 남자 처음 만나봐요.'
무용에 대한 개인과 사회의 수용의지와 저변 확대의 영향에 따라 제가 이러한 이야기를 적지 않게 듣게 되었을 수 있겠지만 그 이전에 무용인으로서 한 사람의 모습을 타인에게 전하고 기억되는 데 있어 가장 큰 경쟁자인 '시간'에 의해 어쩌면 전국 각지에서 저는 처음 만나는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춤은 찰나의 예술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몸이 말하기 위한 도구이면서 전달되는 작품의 완성이기에 무용수의 신체가 죽음을 맞이하면 바라보는 이의 춤을 접할 수 있는 시간도 사라지게 됩니다.
춤, 무용의 재미있는 특징 중 하나로 '집단예술'을 이야기할 수 있는데 주로 2 인무와 군무를 포함하는 창작 작업과 작품의 발현은 인간의 집단지성의 정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이 특별함이 무용을 처음 만나는 문화로 존재하게 하는 하나의 이유가 되기도 하는 듯합니다. 다수가 한정된 공간에 모인 순간에 비로소 작업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미술, 문학과 같은 기록 예술과 또 다르게 한시적 성질을 가지며 동시에 작품을 이야기하는 무용인이 생을 마감했을 때 작품의 모습과 생명 또한 함께 사라진다는 점에서 춤, 무용은 다시금 한시적인 특성을 부여받습니다.
춤, 무용의 공연 또한 무용수와 관객이 한정된 공간과 시간에 함께 존재해야 작품의 발현과 관람이 가능해진다는 점에서 시간의 한계에 부딪히는 동시에 확산성의 부재 또한 한시적인 무용인의 춤 생명력에 결부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작품은 과거와 현재의 사이에서 전달되고 새로운 세대에 의해 재공연 되지만 이는 박물학적인 존재로서 의미가 있고 무용인 한 개인과 그의 춤은 늘 시간이 주는 노화의 힘에 의해 짧은 생을 마감합니다.
저는 무용인이 가진 숙명인 한시성, 즉 시간에 지지 않는 방법을 생각하였고 선택한 것이 바로 글을 적고 기록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용수로서 몸 수명의 한계에 부딪히고 저의 생이 다하더라도 삶이라는 무대 안 밖에서 느끼고 경험한 찰나의 순간들이 보존되어 시간에 지지 않고 보다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도록 한 손에 펜을 쥐었습니다.
'글 쓰는 발레리노'라는 이름을 가지고 지나온 삶의 기억과 경험을 넘어 체화된 몸의 언어들, 그리고 오늘의 이야기들이 주어진 시간 안에서 아직 무용을 만나보지 못한 여러분들과 많은 예술인들을 만나고 소통되기를 소망하며 찰나의 말들을 기록의 글로 적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