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갖고 다닌 컵이 있다.
어떠한 글씨나 표시 하나 없이
하얗고 투명했으며,
누구나 편안히 물을 따르고
담겨진 물을 따뜻이 먹을 수 있었다.
어느 날 보니
그 컵은 그리 투명하거나
하얗지가 않았다.
컵에 들어있는 내용물은 무엇인지 쉬 알아볼 수가 없었고,
촘촘하고 뚜렷하게 새겨진 눈금 때문에
그 누구도 그 무언가를 채우거나 덜어내기가 쉽지가 않았다.
점점 더 선명 해지는 내 안의 수많은 굵은선들이
어제보다 오늘 더 나를 외롭게 만드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