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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호 Nov 22. 2023

당신의 비즈니스를 부수러 왔다.

생태계 파괴자, 와이즐리

이름을 불러서는 안되는 자


  몇 해 전 나는 새롭게 론칭 예정인 스킨케어 브랜드 담당자와의 미팅 중, '원가 공개'를 마케팅 전략으로 내세우는 화장품 브랜드에 대해 화두를 꺼낸 적이 있다. 당시, 뷰티 업계에서 나름 잔뼈 굵은 종사자였던 담당자는 '그 이름'을 듣자마자 화들짝 놀라더니 상당한 경멸과 분노를 표출했다.


  "걔네들이 업계 다 망치고 있어요."


  걔네 이름은 꺼내지도 말라며 치를 떠는 그(그녀) 덕분에, 한동안 우리에게 그들은 '이름을 불러서는 안되는 자', 볼드모트 같은 존재였다. 물론, 한 편으로는 너무 오버가 아닌가 싶었다. 뭐 그렇다고 업계를 망칠 것까지야. 당시 우리 눈에는 그저 뻔한 상술처럼 보이기도 했고(이미 매트리스 업계에서 수차례 써 먹은 수법이기도 하고), 잠깐 반짝하고 사라질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허술하고 투박했으며, 심지어는 원인 모를 이상한 경계심까지 생기게 만들었다. 그러니 분명 당시에는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들의 행보가 이상하다. 아니, 괴상하다. 음... 기괴하다. 그때 당시 그(그녀)가 한 말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 분명 이들은 업계를 망치고 있다. 아니, 이들은 씬(Scene)을 박살 내고 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든 와이즐리


  와이즐리의 이야기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했지만, 와이즐리의 행보는 파격적이다. — 사실은 파괴적, 아니 폭력적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다. 이들은 분명 생태계 교란종이다.  처음 와이즐리를 알게된 건 역시 면도기다. 질레트가 강력한 독재 정권을 구축하고 있던 남성 면도기 시장에 혜성같이 등장한 와이즐리는 금방 입소문을 탔고 많은 남성들의 선택을 받기 시작했다.


  이 안에 나 또한 포함되어 있었으니, 와이즐리의 얼리어답터 격인 셈이다. 하지만 와이즐리와 나의 첫 만남은 그리 좋지 못했다. 속는 셈 치고 구매한 면도날이 생각보다 별로였기 때문이다. 깔끔한 디자인이나 포장에 반해 절삭력은 최악이었고, 설상가상 피부에 상처까지 나버렸다. 말만 뻔지르르한 당시 스타트업들이 그렇듯, 역시나 본질은 허술하고 투박했다. 나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고, 결국 다시 질레트로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당시 그렇게 느낀 사람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슬슬 안 좋은 리뷰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각종 커뮤니티에서의 평판도 추락했다. 그렇게 와이즐리도 마약 베개처럼 대중의 기억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와이즐리에게서 한 통의 메시지를 받았다.


  3만5000명 이탈 고객을 돌아오게 한 와이즐리 캠페인


  와이즐리는 마음이 돌아선 고객의 마음을 완전히 돌리는데 성공했고,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그 비결은 현란한 혓바닥도, 대단한 마케팅 스킬도 아닌, 오직 '품질'에 있었다. 꼼수는 없었다. 분명히 절삭력이 좋아졌다. 나 역시 그 때를 기점으로, 지금까지 여전히 와이즐리의 면도날을 사용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위의 퍼블리 아티클을 참고하길.







생태계 파괴자 와이즐리


  만약 이들이 여기서 멈추었다면 이렇게 글까지 쓰며 오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괜찮은 면도기 스타트업 정도로 남았겠지.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들은 생태계 교란종이자 파괴자이다. 이미 면도기를 통해 한 번의 성공을 경험한 이들은, 이 공식을 대입해 다른 분야도 서서히 점령하기 시작했다. — 아직 현재 진행중이지만 시간 문제라고 본다. 아래의 상세페이지를 들어가서 꼭 두 눈으로 확인해보길 바란다.



'이거 진짜 이래도 돼?'


  처음 이 상세페이지를 보았을 때, 우리는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디서 많이 본 제품들이다. 심지어 이들은 그 제품이 '무엇'인지까지 친절하게 우리에게 각인해 준다. 그래, 대놓고 베꼈다. 이런 방식은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방식이다.


  달바의 베스트셀러인 세럼이 정가 29,900원(올리브영 기준)인데, 와이즐리에서는 정가 9,190원, 회원가 5,590원에 판매한다. 다이슨은 더 가관이다. 다이슨 슈퍼소닉은 정가 50만원에 육박한다. 그런데 와이즐리에서는 비슷한 제품을 정가 49,900원, 회원가 39,490원에 판매한다. 참고한 제품에 비해 5배, 10배 저렴한 셈이다. 문제는 품질까지 거의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다른 비즈니스를 박살내고 있다. 영화 파이트 클럽의 대사가 떠오른다.


  "Everything's copy of a copy of a copy..."


  *사실 웬만한 화장품 업계 관계자라면 다 안다. 화장품의 원가는 상당히 저렴한 편으로 대부분 폭리를 취한다. 때문에 유명 연예인을 내세우고 많은 광고비를 쓰는 게 가능하다. 심지어 화장품 제조 업체를 찾아가면 비슷한(똑같은)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이런 기형적 구조는 비단 화장품 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아는 어떤 유명한 브랜드는 물건 대부분을 타오바오(중국 쇼핑몰)에서 공수하고, 포장만 다시 해서 판다. 그러니까 고객은 판매가에서 다시 한번 판매가가 붙은 가격에 물건을 사는 셈이다. 패션 브랜드 라벨 교체(일명 택갈이)는 이미 유명하고, 아웃도어 브랜드도 역시 거품이 많이 껴있다. 안마 의자는 좀 혼나야 한다. 그래, 나는 어쩌면 다 거기서 거기라는 말을 하고 싶은거다.  물론 아닌 경우도 일부 있겠지만. — 그런데 이 녀석들은 대놓고 유명 베스트셀러를 참고해서 만들었다고 공개하고, 가격을 파격적으로 낮춰서 판매하는, 다 때려 부수는 방식의 누구나 머리로만 상상할 법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일상을 현명하게'였던 슬로건은 최근 '최고의 가성비가 아니면 팔지 않습니다.'로 바뀌었다.








품질은 타협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을 빼먹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품질 아닌가. 대충 유명한 걸 비슷하게 베껴서 어설프게 팔면 중국판 쇼미더머니와 다를 바가 없으니까. 안타깝게도(?) 와이즐리는 이미 품질로 인한 드라마틱한 고객 변심을 경험해 본 적이 있다. 즉, 품질은 타협하지 않는다. 영양제부터 화장품, 단백질 보충제, 드라이기, 심지어 매트리스 토퍼와 냄비까지 거를 타선이 없다. 실제로 전부 구매해서 사용해 봤다. 다이슨 슈퍼 소닉을 참고한 헤어 드라이기에서는 헛웃음만 나왔다. 그래, 사실이다. 유명 브랜드에서 이미 검증된 좋은 제품을 말도 안 되는 가격에 파는 것이... 정말 사실이다.



원가 공개를 넘어서 원가 판매


  이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한 번 더 말하지만, 이들은 천사의 탈을 쓴 악마다. — 사실 악마의 탈을 쓴 천사이기도 하다. — 최근에는 제로 마진 멤버십을 출시했다. 이제 전 제품을 원가에 판매하고, 아예 마진을 없애겠다고 선언했다. 이미 말도 안 되게 싼 가격에서, 추가로 더 말도 안 되는 가격에 판매하겠다는 것이다. 회사의 수익은 오직 '멤버십 가입비'. 이 가입비는 겨우 월 2,990원으로 제품 1개만 구입해도 이미 소비자는 이득이다.









진실은 아흔아홉 개의 얼굴을 가졌다.


  이들에게서 접하는 소식은 매번 충격적이다. 툭하면 가격 인하 소식을 전하더니 이제는 카드사 수수료 3.5%를 제외하고 마진을 전혀 남기지 않겠다고 선언해버리는, 커머스 중심에서 브랜드 중심으로 이동 중인 씬(Scene)에 냉소 섞인 비웃음을 지으며 가차 없이 생태계를 파괴해 버리는, 소비자 입장에서는 반갑고 공급자의 입장에선 그저 고깝기만 한.


  이들은 과연 천사일까 악마일까. 이들은 우리를 정말 현명하게 만들어주는 걸까, 아니면 더 멍청하게 만드는 걸까. 이들의 방식이 과연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다른 기업이 계속 가만히 두고 볼까, 아니면 조치를 취할까. 만약 생명의 위협을 느낀 다른 거대 기업들이 심판의 칼을 꺼내든다면, 그때 이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누가 다윗이고 누가 골리앗인가. 아, 궁금한 것 투성이다. 아니, 나만 재밌나?


*쓰고 보니 광고 같지만 광고 아니다. 관련 없다. 하지만 주식은 사고 싶다.


와이즐리 창업자의 이야기

"와이즐리는 왜?" 질문과 답변

와이즐리가 다양한 생활 소비재를 만드는 이유





기획자의 시선

프로젝트룸 대표 기획자 노인호의 지극히 개인적인 업계 관찰 & 인사이트 공유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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