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마르디히말, 2020년 1월
옷은 다 젖어서 옷의 기능을 상실했고 털모자도 마찬가지였다. 머리는 땀 혹은 눈 때문에 축축해졌다. 나는 이 날 다시는, 네버, 평생, 눈을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 됐다.
고도가 낮아지면서 눈이 비로 바뀌기 시작했고, 젖는 속도는 당연히 더 빨라졌다. 이미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젖은 상태에서 물이 더 묻는걸 '젖는다'라고 표현하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상황엔 고어텍스니 뭐니 해도 햄이 가진 김장비닐이 최고였다. 다음에는 나도 꼭 김장비닐을 가지고 오겠다는 다짐을 했(으나 다음번에도 깜빡하고 안 가지고 올라가서 고생을 했었)다. 진눈깨비에서 비로 변하려는 순간 우리는 로우캠프에 도착했다. 로우캠프 롯지 문을 여는 순간 온기가 훅하고 튀어나왔다. 그 온기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안도감은 이 여행의 모든 걸 담고 있었다.
"Welcome to hotel California!". 막스였다.
롯지 가운데에 있는 난로 주변에는 온갖 옷, 장갑, 모자가 널려있었다. 먼저 와서 옷 정리가 끝난 제이슨은 아일랜드에서 공수해온 꾸깃꾸깃한 홍차 박스에서 티백을 꺼내서 나눠줬고 난로 위에 있던 주전자를 가져와서 따뜻한 물까지 부어줬다. 보통 산 위에서 뜨거운 물은 돈을 내고 마셔야 하는데, 제이슨은 이상하고 비싼 패키지로 와서 주전자를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 제이슨은 산 위의 재력가였다.
내려올 때 안 넘어지겠다고 있는 흙이란 흙은 다 움켜쥐고 내려와서 손톱이 까맸지만 당연히 안 씻었다. 끈도 없는 티백을 뜨거운 물에 넣고 포크로 몇 번 찍어 내린 다음 목구녕에 들이부었다. 그리고 나선 재활용을 위해 휴지 위에 쌓아놨던 티백 네 개 중 하나를 집어서(위생관념은 사치다) 뜨거운 물에 던져놓고 휘휘 젓고 들이붓기를 반복했다. 티백이 제기능을 상실할 때까지 우려먹고 나서야 놓아줬다.
옷은 타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연기를 폴폴 내가며 말랐고, 나는 아끼고 아끼던 마지막 미역국 블록을 깠다. 제이슨과 막스는 미역국 비주얼에 충격을 받은 듯했지만 우린 즐거웠다. 롯지 안은 따뜻하고 아늑했다.
얼마 전에 안산을 다녀왔다. 맥주를 맛있게 마시겠다며 산행 내내 물을 마시지 않았고 탈수 증세가 약간 오고 나서야 멍청한 짓이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역시 그렇게 해서 마신 맥주는 당연히도 맛있었다. 그냥 마셔도 맛있는 맥주지만 목 마른 상태에 마시는 맥주는 더 맛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눈, 비가 재난영화처럼 올 때에 마주하는 피난처 같은 따뜻하고 아늑한 롯지를 이길 롯지는 없다(돌아갈래?물어보면 주저 없이 꺼지라고 대답하겠지만-). 탈진 후의 맥주를 찾아서 나는 네팔을, 몽골을, 고생길을 찾아간다. 여행은 힘들다. 그래서 난 여행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