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마르디히말, 2020년 1월
끝이 없는 내리막길에 한계를 느꼈던 날도, 얇은 천 하나가 가림막의 전부였던 화장실에서 만족스러운 샤워를 한 날도, 악명 높은 란드룩-포레스트캠프 구간을 겨우 기어오른 날도 모두 지나서 마르디히말 트랙의 하이라이트인 하이캠프에 가는 날이었다.
하이캠프로 가는 길에 있는 바달단다는 듣던 대로 경치가 엄청났다. 눈알을 아무리 굴려봐도 설산만 보여서 눈이 시릴 정도였다. 근데 능선 구간에 들어가면서부터 구름이 산봉우리들을 가리기 시작했다. 걸음을 재촉하다 보니 미끄러운 진흙길에서 자꾸 미끄러졌고, 위태로운 순간을 몇 번 지나서 한번 구르기까지 했다. 바지가 찢어졌다. 내가 가진 바지는 두 개가 전부여서, 찢어진 바지를 바로 버릴 순 없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질척거렸던 진흙길은 꽁꽁 언 얼음길로 바뀌었다.
하이캠프에 도착했을 때에는 사방이 구름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다이닝룸에 앉아서 창문을 보면 구름만 보여서 비행기에 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지난 며칠간 매일 날씨가 더할 나위 없이 좋았어서 억울한 마음도 들었지만, 내일부턴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큰 위로가 됐다.
다음날엔 커튼을 열기 전에도 날씨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커튼 천 사이로 아침햇살이 안 들어왔다. 말 그래도 설상가상이었다. 아니 설상설상이었다. 그칠 기미가 안보였다. 바람 때문에 쉴 새 없이 나풀거리는 깃발 빼고는 모든 게 눈 밑에 깔려있었다. 겨울 산행이어서 이런 상황을 대비한 장비는-쓸 일이 없길 바라면서-모두 갖고 올라왔지만, 난 준비가 안되어있었다.
전날까지 풀, 길, 하늘의 형상을 하고 있던 것들은 색깔을 뺏겼다. 온통 검은색, 하얀색이 됐다. 망할 고어텍스 바람막이는 바람도, 눈도 막아주지 못했고 속수무책으로 젖었다. 막스는 로우캠프에서 내 꼴을 보더니 바람막이를 네팔에서 샀느냐고 물었다. 내 바람막이는 오른팔에 파란색으로 고어텍스라고 당당히 쓰여있기까지 한 정품이었다. 너무 정품이라 억울하기까지 했다.
어제의 멋진 능선은 위협적으로 변해있었다. 옆으로 조금이라도 발을 잘못 딛거나 미끄러지면 굴러 떨어져서 아무도 날 영영 찾지 못할 것 같았다. 바달단다가 나오면 능선이 끝난 다는 걸 알았고 열심히 바달단다를 향해 걸었지만 아이젠에 들러붙어서 걸음을 방해하는 눈 때문에 속도가 나지 않았다. 걸음이 빠른 제이슨이랑 막스는 우리를 지나치면서 내 가방에 처량하게 매달려있는 쪼리를 보고 대차게 웃어댔다. 나도 그 심각한 상황에 웃음이 터졌다. 스패츠, 아이젠, 바람막이, 장갑은 모두 다 제 역할을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만 걷고 싶었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서웠다.
스패츠는 진흙범벅이 되고, 머리는 땀범벅이 된 상태로 바달단다에 도착했다. 기적적으로 한 번도 넘어지지 않았다. 온 신경이 죽지 않는 데에 집중되어있었기 때문에 바달단다에 도착하자마자 엄청난 피로가 느껴졌다. 넘어져도 죽진 않는다는 안도감도 함께 느껴졌다. 하도 땅만 보고 내려왔더니 고개까지 아팠다.
전날 온통 초록색이었던 숲도 모두 다 하얀색으로 변해있었다. 옷은 이미 다 젖고 더러워져서 넘어져도 별 상관없긴 했지만, 넘어지긴 싫었다. 나무뿌리를 밟고 코너를 돌면서 퍽 하고 넘어졌다. 베테랑인 햄은 길을 찾다가 넘어지기도 했고, 언니는 말썽 부리는 아이젠을 벗어던지고 걷다가 여러 번 미끄러졌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멀리서 보면 세 오뚝이가 걷는 것처럼 보였을 거다.
믿을 수 없겠지만, 길에서 죽음이 배제되고 나니 낭만적인 부분도 있긴 했다. 눈이 모든 소리를 흡수해서 이 동화 속에는 우리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죽기 전에 한 번은 더 경험해보고 싶은 이상한 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