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대학원생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코로나 시대를 사는 사람 중에 계획이 안 틀어진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개인적으로 아주 큰 변화가 있어야 했던 해가 올해였어서 타격이 조금 더 크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파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조지아 여행을 진하게 끝내고 미국으로 가서 박사 생활을 시작하려는 참이었어야 했다. 오늘쯤이면 툴툴거리면서 일주일 간 숲 속에서 하는 오티를 준비하고 있었을 거다.
3월부터 might과 probably가 난무하는 이메일을 학교와 주고받으면서 계속 아무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 부딪히다가 입학을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시한부 백수가 됐다.
4월에 꼭 처리할 일은 딱 두 가지가 있었는데 운전면허랑 사랑니 뽑기였다. 코로나가 금방 끝나서 미국에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때였다. 죽도록 미루고 미루다가 4월 30일이 돼서야 부랴부랴 면허학원을 등록했고, 까먹고 깜빡이를 안 꺼서 도로주행 시험을 한 번 떨어진 것 말고는 별문제 없이 면허를 땄다. 사랑니는 아직도 안 뽑았는데 내년 출국 직전까지 안 뽑을 것 같다.
올해 초 치앙마이에서 이천 원 주고 자른 짧은 앞머리는 그대로다. 앞머리 때문에 네팔에선 외국인들이 나를 두고 일본인인지 중국인인지 태국인인지 네팔인인지 토론을 하기도 했다. 왜 한국인 옵션은 있지도 않은 건데? 한 달 전엔 그 앞머리로 할머니 단골 미용실에 놀러 갔다가 집에서 자른 앞머리냐며 타박도 받고, 길고 귀찮았던 머리도 단발로 잘라버렸다. 친구들이 사랑짱이라고 부른다.
짧은 앞머리, 단발머리, 마스크, 츄리닝, 백팩 조합으론 도저히 편의점에서 맥주를 살 수가 없다. 원래는 귀찮아서 카드 하나만 덜렁 가지고 다녔는데 이젠 신분증도 들고 다닌다. 백수가 부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는 낮술, 점심 오마카세(+낮술)라고 여기는 나는 열심히 사치 부리며 살고 있다.
몇 주 간 집에 붙박이 장롱처럼 처박혀서 역마살을 거스를 수 있는 대로 거스르며 온갖 넷플릭스 미드, 영화, 중고 책을 섭렵했다. 스콜세지 영화보단 타란티노 영화가, 멋진 풍경과 감상으로 가득 찬 여행 에세이보단 궁상과 찌질함이 묻어나는 여행 에세이가 내 취향이라는 걸 알게 된 건 큰 수확이다. 박민우 작가의 '지금이니까 인도, 지금이라서 훈자'를 읽으면 인도나 훈자를 가고 싶다가도 가기 싫어지니까 어쨌든 아무 데도 못 가는 지금 읽기 좋은 것 같다.
고등학생 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과목은 생물이었고, 대학교, 대학원 전공도 생명과학이었다. 당연히 박사과정 전공도 생명과학이다. 자소서를 쓰면서 대학 입학부터 석사 학위까지 쭉 돌이켜보니, 그간 난 필요 이상으로 술을 마셨고(이건 지금도 마찬가지), 열심히 이곳저곳 쏘다녔으며, 전공에 갇혀서 새로운 걸 배우지 않았다. 아, GRE라는 거지 같은 영어시험을 봐야 해서 'caterwaul-고양이가 그릉그릉 거리는 소리'같은 이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영단어들을 배우긴 했는데, 미국 유학 때문에 배운 거니 새로운 걸로 치진 않을 거다. 새로운 게 필요하다.
6월 중순엔 격렬히 누워있는 게 지겨워졌다. 직장인 친구들한테 누워있는 게 지겹다고 얘기했다가 아주 매콤한 눈빛을 받았다. 누워있는 백수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걸 배워보기로 했다. 잠시 멈췄던 테니스 레슨을 다시 받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