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서울, 청계산
내 메모장 할 일 목록엔 오랫동안 청계산 정복이 있었다. 히말라야까지 다녀와놓고 중도 포기했던 산이 청계산이었다. 청계산에 진짜 맛있는 곤드레밥집이 있는데 그걸 맛있게 먹겠다며 폭염에 올라갔다가 산 중턱 벤치에 제대로 퍼졌었다. 할저씨들이랑 속도 경쟁은 왜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3년간 안고 살았던 청계산 중도포기자라는 불명예 타이틀을 뗄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사람이 제일 없을 것 코스로 갔는데 이건 큰 실수였다. 우리 집 대표 산신령인 아빠가 추천한 사람 없는 코스는 옛골 등산로로 올라가서 원터골 등산로로 내려오는 코스였고 뒤늦게 알았지만 봉우리를 두 개나 지나야 하는 극악한 코스였다. 아빠는 왜 나를 미워하는가.
첫 번째 봉우리인 이수봉까지 가는 길엔 껄떡고개가 있었다. 껄떡고개 이정표가 있길래 드디어 끝이구나 싶었는데 시작 표시였다. 힘들어서 짚은 나무엔 송충이(매미나방 애벌레였을 수도 있음)가 있었고 하산이 끝나는 순간까지 나무는 절대 안 만졌다. 분명히 남색 옷을 입고 갔는데 이수봉에 도착하니 검은색 옷이 되어있었다. 여름 산행엔 땀에 젖어도 색이 변하지 않는 옷(검은색이라던지 흰색......)이나 기능성 옷을 입는 게 좋겠다.
이수봉엔 뷰는 없고 벌은 있었다. 간헐적 단식한다고 설치던 시기여서 식사시간이 애매하길래 오렌지를 싸갔는데 통을 열자마자 벌이 달려들었다. 웅웅 거리는 소리가 에어팟 노이즈 캔슬링을 뚫고 들어왔다. 오렌지를 포기하고 일어섰다. 단식 시간이 길어졌다.
내 인생에 다신 없을 이수봉(547m)을 지나서 다음 봉우리인 매봉(582m)으로 얼른 도망쳤다. 짧긴 했지만 능선을 타는 구간이 있어서 산행 중 제일 좋았던 구간이다.
매봉도 녹초가 돼서 도착했고,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당연히 나 포함) 각자 벤치에 앉아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가방에 있는 오렌지랑 당근이 데워졌을 생각을 하니 아무리 배고파도 먹고 싶지가 않았다. 물만 벌컥 들이켜고 뷰를 찾아 매바위로 갔다. 매봉은 매봉이 아니라 매바위가 메인이다.
매바위에 올라서니 내가 죽을 때까지 못 살 것 같은 아파트들이 우스워보였고 요상한 해방감이 들었다. 나무가 많이 없기도 했고 해가 정수리 위에 떠있어서 오래 버티긴 힘들었다. 게다가 곤드레밥과 맥주가 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버틸 이유가 없었다.
끊임없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청계산은 다시 안 오겠다고 다짐했는데, 죽어도 다신 안 간다던 네팔도 한 번으로 안 끝났으니 청계산도 어떻게 될진 모르겠다. 맛있는 곤드레밥이 먹고 싶으면 어쩔 수 없이 청계산으로 가야 한다. 그땐 옥녀봉만 가도 될 것 같긴 하지만. 아니. 그냥 산 안 올라가고 밥만 먹어도 되지 않나?